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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과 한국은 근대에 들어선 이후 긴 시간 동 안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섰다. 양국의 항일투쟁은 근대 전환기에 있 어서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대 상황에서 양국의 시인 이 모두 수많은 우수한 시 작품이 창작했다. 그러므로 한·중 양국의 근대 문학사에서 한국과 중국의 항일시는 중요한 문학적 업적이다. 따라서 양 국 항일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고는 한·중 양국 항일시대의 대표 시인 윤동주와 대망서의 항일시를 비교 분석했다. 윤동주의 시 작품 「서시」, 「팔복」, 「슬픈 족속」과 대망서의 「원단 축복」, 「나는 파손된 손바닥으로」를 통해서 두 시인의 좌절과 방황에 대한 항일 의식을 분석했다. 두 시인이 함께 보여준 항일의 굳은 신념에 관한 연구 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또 다른 고향」과 대망서의 「나는 파손 한 손바닥으로」, 「옥중 벽에 쓴 글」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윤동주와 대망서 두 시인의 항일과 저항 의식의 공통점과 차이 점을 정리하였고 두 시인은 개인적 좌절과 방황, 항일의 고난과 신념을 시에 담아내며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윤동주는 개인적, 내면적 표현에 치중한 반면, 대망서는 사회적 현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통해 항일 의 식을 표현한 결론을 내었다.
        6,600원
        2.
        2019.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로서 릴케와 윤동주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철학자였다. 이 논문은 릴케의 문학에 나타난 키르케고르 사상의 전유와 윤동주의 문학에 나타난 키르케고르 사상의 전유를 비교한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을 지닌 존재로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앙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나아가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신의 사랑, 즉,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까지 사랑하는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임을 주장한다. 릴케와 윤동주는 인간 존재의 취약한 실존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면서 절망을 표현해 온 시인들이었다. 이러한 점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나타난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와 상당히 깊이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한편 릴케와 윤동주는 자신들의 문학의 정점에서 인류애라고 할 법한 아가페로서의 사랑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사랑은 바로 키르케고르의 『사랑의 역사』에 나타난 사랑과 깊이 맞닿아 있다. 특히 윤동주는 예수를 닮아가려 했음을 한국의 역사를 위한 순교자적 죽음으로 증명했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릴케와 또 다른 위대한 시인으로 고평되어야 한다.
        9,000원
        5.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16세기에 걸쳐 계속된 몇 차례의 사화로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의 길을 선택 하였다. 이들은 물러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그들은 ‘隱進’ · ‘處士’ · ‘逸士’ · ‘徵士’ · ‘居士’ 등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에서는 遺逸薦擧制라는 독특한 천거 방식을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동주 성제원(1 506-1559) 또한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해 상을 직접 보고 은거하였다가 후에 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退處型사림들의 보편적 학문 성향, 곧 이론적이고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추구보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근본을 두되 성리학 외의 불교 · 노장은 물론 천문 · 복서 · 의 학에 이르는 잡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탄력적인 학문성향을 나타내였다. 士의 출처 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왕도를 실행할 만한가, 士자신이 그 소임을 감당할 충분 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라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출사하지 않다가 말년에 遺逸薦擧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한 능력을 발휘할 계기로 삼았다. 이는 3년 간의 치세를 마치자 곧바로 은거의 삶으로 돌아간 그의 결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주를 비롯한 이 시기 遺逸之士들의 이 같은 처세는 후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출처의 자세와 방향에 準據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