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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충주 견학리 토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선단부에 축조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토성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유적의 편년은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대부분의 토기편이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른바 호족이 발생하던 시기에 경영되다가 고려시대 이후로는 폐기된 토성으로 추정하였다. 이 토성에서는 대체로 30cm를 전후한 척도가 적용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밖에 9~10세기 경에 축성되었다고 판단되는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판축 토성은 내외에 석축 기단과 4m 내외의 영정주 간격을 가진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크게 2가지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먼저 주요 교통로상에 조망이 우수한 곳을 택해 방형 또는 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에는 견학리 토성을 비롯하여 목천토성, 수촌리 토성이 해당한다. 대체로 주변의 높은 산지에서 연결된 구릉이 평지와 맞닿는 말단부에 방형의 형태로 축조되어 주변의 이동을 관측하기에 매우 용이한 특징을 보인다. 이들 성곽은 驛站과 관련된 시설로 보이는데, 특히 주위에 역원이 존재하고 있어 고려․조선시대에 역원이 자리하기 이전 역참으로 활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 사산성과 신금성의 경우에는 초기 읍성의 모습으로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이미 신금성의 보고자는 治所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의 縣城으로 비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점차 포곡식으로 전환하는 판축 토성은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권위의 상징으로 규모를 갖춘 문지를 조성하고, 방어적인 요소가 고려되면서 점차 대형화한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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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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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에 견훤이 대량과 구사를 공취한 다음에 나아갔다는 진례는 구사가 창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김해의 진례로 보아야 하며 진례성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의 발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검토한 결과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반 경에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진례성주로 기록된 김인광과 소충자와 소율희 등은 당시 진례를 대표하는 권력자로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진례성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결과 진례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축성으로 확인되었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은 김해로부터 거리가 부합되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그 위치 또한 진례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세력이 위치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송정리토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송정리토성은 아직 정식으로 조사된 바가 없어 정확한 축조시기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몇몇 출토유물이나 고고역사학적인 상황만으로 비정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어 차후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기록에는 김해로 비정되는 금관고성을 匝干 忠至가 공취하여 성주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충지는 진례 출신이므로 진례의 세력이 결국 김해까지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하대에 선승들은 모두 진례로 가서 김인광, 소충자, 소율희를 보았다고 하였지 김해 금관경에 갔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은 결국 진례와 김해의 정치적 성향 또는 역사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양동산성은 신라가 김해지역을 정복한 다음 맨 처음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진례지역과 김해와 진례의 교통로와 진례 중심을 조망할 수 있는 양동산성을 먼저 축조한 것은 신라와 가까운 김해와는 반대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진례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야시대 김해의 대표세력이 양동고분 축조세력에서 대성동고분 축조세력으로 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김해와 진례의 세력 이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점도 차후의 연구에서는 진례와 김해의 관계에 대하여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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