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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콘텐츠 가운데 한국 전체나 특정 지역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미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거나 확보할 필요가 있는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해양 인물과 관련해서 대표적인 것은 ‘이사부(異斯夫)’와 ‘장보고(張 保皐)’ 관련 문화콘텐츠다. 이사부는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울릉도 독도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고 있고,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데서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해양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순수한 창작으로만 완성하는 문화콘텐츠와 다르다. 바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와의 거리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기에 해양 인 물을 대상으로 한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성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해양 인물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나 형상화에는 학술적 결과물에 의해서만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의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도를 확보하는가도 중요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해양 인물을 어떻게 문화콘텐츠로 개발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며, 문화콘텐츠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필자는 그 해답을 스토리텔링에서 찾고 싶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내용과 기술, 매체를 아우르는 일종의 서사방식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문화콘텐츠의 개발로 해양 인물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대중들과의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양 인물 관련 연구자와 지방자치단체, 지역민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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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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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발전에 있어서 해양진출은 대륙진출보다 위험성은 있으나, 그 진취성과 개방성으로 영향력이 크다. 이러한 사실은 Rome, Saracen의 역사와 Portugal, Spain, Netherland 그리고 영구에 의해서 이룩된 대서양시대를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도 백제가 일찍 서해로 진출하여 해양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처음으로 나타냈다. 신라의 경우 한반도의 동남부에 편재되어 있어 해양진출이 어려웠고, 더구나 왜구의 계속된 침입으로 유일한 탈출구인 동해로의 진출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5세기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적 성장은 가능했으나 고구려(광개토왕 장수왕)의 남하로 내륙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동해안으로의 북진을 통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하가 약화되면서 신라는 한강유역으로의 진출과 동시에 동해안으로의 진출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이 우산국 정벌이며, 이를 계기로 왜국의 침범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신라의 첫 번째의 해외진출이었다. 그 후 신라통일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대당 접근으로 당을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없었다. 신라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은 9세기 후반 이후였다. 나 당 양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해적의 횡포가 증가되면서 제2의 해외진출의 필요성에서 장보고의 활동 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산동반도뿐 아니라, 강소성, 절강성 일대에 신라의 활동으로 드디어 해양개척 무역입국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후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해외진출이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제3의 해양진출로 독도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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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신라 최고 귀족으로서 신라의 대외팽창과 국가체제 정비에 앞장 선 국가의 동량이었다. 그가 살았던 6세기 전반은 신라가 크게 융성하고 뻗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국사 편찬을 건의함으로써 내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획을 그었고, 동해안 진출과 남해안의 가야 진출을 주도함으로써, 동남해 연안항로에 대한 주도권 확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이후 신라의 국가 발전에 절대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동해안 패권을 확립한 것을 의미하고, 금관국의 복속은 김유신 가문을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신라의 삼국통 일이 이사부와 김유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사부가 성취한 해양진출의 큰 의의이다. 장보고는 섬 출신의 일개 평민 신분으로 이사부와는 신분적으로 대조적이다. 그 가 살았던 9세기 전반은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역보다는 개인 능력자가 주도하는 사무역이 발전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장보고는 당으로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양무역의 최고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828년에는 신라에 돌아와서 흥덕왕의 지지를 얻어내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그는 단순한 무역업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지역에 대규모 청자생산단지를 건설하여 신라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게 했으며, 한 중 일의 바닷길을 잇는 이른바 ‘장보고항로’를 활성화시켰다. 청자생산단지는 이후 고려청자로 이어져 전성기에 이르렀고, ‘장보고항로’는 고려시대에도 핵심 항로로 지속 발전해 갔다. 결국 이사부는 ‘원조 해양진출의 영웅’, 장보고는 ‘본격 해양진출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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