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鄭載圭(老柏軒, 1843-1911) 시세계에 나타난 학문정신을 탐구하 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 남 기호학파의 문학세계, 그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규의 삶과 문학에 저류하고 있는 것은 강한 호학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활동은 모두 여기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정재규의 시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학문적 연대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창작활동은 학문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학문 내용은 그 중심에 율곡학이 있었고, 그 주변에 남명학과 퇴계학 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기호학에 연원을 두면서도 영남학으로 열려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성리학적 이념과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문학과 성리학이 일체를 이루며 작품군을 형 성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과 그것의 시적 형상은 정재규의 시작 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념성으로 편향되어 있 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례없는 위난의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작품 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복령과 단발령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경 험하면서 明末 절의를 지키며 죽어간 중국 선비들을 시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정재규 시세계의 의미구조는 단순하지가 않다. 호학정신에 바탕하여 학문적 연대를 통해 작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현의 도학을 계승하고자 했고, 또한 다 양한 사물에서 이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다 는 자각 하에 당대를 극도의 위기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 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규의 시는 실천정신과 결합되어 있다기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 우세하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전통적인 세 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을 묵수하면서 현실대응을 시도한 당연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의 시세계에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 러나 하나의 특징과 한계를 이룬다.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한말의 혼란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1843 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개화기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 에서 일생 실추된 전통유학의 도를 회복하고 확립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인근 타 학맥의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유, 치열한 논쟁 등을 통해 그들의 학설을 접하고 수용하면서도, 강우지역에서 일어나는 여타의 강회나 인 근 명승으로의 유람 등을 통해 학문적 결속력을 심화시킨 것 등은 모두 노사학 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생 강우지역에서 스승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생 전통유학의 도를 扶持하고 이를 통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 백헌의 정신은 사후 그 문인들의 학문 활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정 재규의 이러한 삶과 학문 활동이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대처방식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당시 종래의 전통유학을 고수해 오던 노백헌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鄭載圭(1843-1911)의 학문정신과 대학 해석에 대해 살펴본 것으 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재규는 인륜이 무너져 금수의 세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守正主義를 강조했고 衛正斥邪를 부르짖었다. 그는 도 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守死善道意識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를 보전 하기 위해 讀書種子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재규의 학문방법은 독 서를 통한 지식을 실생활에서 체찰하는 隨事省察과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 는 反身踐實로 요약된다. 이는 分殊 속에서 理를 구현하려 한 주리론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정재규의 대학 해석 기본관점은 ‘新民도 明德 속의 일’로 보는 명명덕에 치 중한 해석과 팔조목 가운데 反身踐實에 해당하는 修身에 치중한 해석이다. 해 석의 주요 특징으로는, 1)反身踐實의 관점에서 誠意를 대학의 골자로 본 점, 2)「大學章句序」의 分節이 선유들의 설과 다르며 性․敎에 중점을 두어 성인의 가 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본 것, 3)明德을 ‘天之明命’과 연관시켜 理로 보고, 心合理氣를 전제로 하되 心은 氣之精爽, 明德은 心之无妄 으로 보아 理主氣資의 입장에서 心 속에서 眞實无妄한 본체를 명덕으로 본 것, 4) 正心을 全體主宰處에서 照管하는 것으로 보아 장구의 ‘敬以直之’에 천착해 體까 지 말한 것으로 보는 설을 따르지 않고, 用의 측면만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재규의 대학은 해석을 경학사적 시각에서 보면, 주리론적 관점에서 明德 를 理로 보아 이에 치중해 해석한 것과 反身踐實의 관점에서 성의․정심에 치중 한 해석을 하면서 齊家 이하를 수신의 實事로 본 것이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그 의 새로운 해석성향이라 하겠다.
鄭載圭는 奇正鎭의 학문을 영남에 전한 학자이다. 기정진의 문집 간행과 추모 문자를 제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그는 스승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 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스승의 학설에 田愚의 비판이 있자 師說을 변호하면 서 자신의 성리학을 체계화한다. 지향해야 할 가치의 폭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主理의 논리로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성리학이 었는데, 理의 主宰·인물성동이론·本心論 등을 통해 주리의 논리를 전개한다. 정 재규의 성리학을 규명하는 본 연구는 그의 학설의 모태가 된 기정진의 성리학, 기정진의 학설에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전우의 성리 이론을 먼저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정재규 성리학의 역할과 성격을 이해하여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정진 과 정재규의 주리론과 전우의 주기론이 갖는 학술적 의미를 조명해 보았다. 그 결과 정재규의 성리학은 한말 주리론의 삼대가인 기정진, 李恒老, 李震相의 학 문과 정신적으로 상통하는 것이었고, 또한 율곡학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주기론의 장점을 버리지 않고 주리의 학문과 결합시킨 학문이었다.
본고는 노사학파가 19세기 후반 영남 서부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문인 정재규의 역할을 분석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은 1840년 대부터 서학을 배척하고 의리와 도덕의 확산을 꾀하였던 산림학자로서 중앙정 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영남의 노론학자들로부터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들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의 일족이나 문인들도 세도정치기와 대원군 집권기에 점차 중앙정계와 향촌사회 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래 영남 서부지역에서 당색의 대립이 약화되고 다른 당파나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영남 서부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 물들이었으며, 새롭게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려 는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관과 협조하여 향 약 실시나 소학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강학활동에 힘써 영남 서부 지역에 많 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정여창과 조식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이들을 모신 서원이나 사우의 향례에 참여하거나 강회를 자주 개최하 여 진주와 하동․산청․합천․의령 일대의 영남지역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넓혀 나갔다. 이러한 영남지역에서의 노사학파의 성장은 특히 정재규의 노력에 힘입은 바 가 컸다. 정재규는 기정진 사후 적극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내 에서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동문이나 문인들과 자주 강회를 열어 성 리학과 예학을 강론함으로서 기정진의 주리론이 널리 보급되고 위정척사의 주 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또한 기정진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답문류편(答問類 編)을 편찬하였으며, 1901년 기정진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중간했을 때에도 단 성의 신안정사에서 직접 일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 이후 기정진의 논 설인 「외필(猥筆)」이나 「납량사의(納凉私議)」등에 대해 영남지역의 노론이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이 이단으로 배격하였을 때, 정재규는 동문과 문인들에 게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게 하였으며, 본인도 직접 논서를 지어 기정진의 주 리론이 결코 주희나 이이의 학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재규는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정진의 위 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에 서부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개화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 에 항거하였다. 이어 그는 1905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민 심의 결집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문인 들과 함께 190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충청도의 최익현과 전라도의 기우 만과 함께 각지에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문인들을 유생들에게 파견하였다. 비록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의병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상태 에서 실패하였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