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활동을 시작한 시기, 주로 1890년대에 이루어진 불교와 개신교의 만남을 다룬다. 1880년대 말 한국에 처음 들 어온 서양인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거주했던 서울 도성 내에서 사찰을 볼 수 없었기에, 한국은 종교 없는 나라라는 선입관을 한동안 유지했다. 1890년대 들어 활동 반경이 서울 근교로 확장하자, 선교사들은 도성 바 깥에 있는 살아있는 불교와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는 머릿속에 있 던 우상숭배 관념을 불교를 통해 재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의 불교는 퇴락한 전통이고 승려들은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불교와 개신교 선교사의 만남은 의외로 휴양의 맥락에서 이루어기도 했는데, 그들이 삼막사에 머문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다. 한 달 이상의 만남과 접촉은 친밀함의 형성, 상대방 의례에 대한 면밀한 관찰로 이어졌 다. 한편 한국 전통에 다른 태도를 보인 성공회 선교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사제직과 수행 공동체를 존중하는 교단에 속했기에, 불교에 서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는 불교에 관한 부정적 관념이나 선입관에서 만남을 시 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공간 내에서 몸과 몸이 만나는 현실 속의 만남은 상호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 이 만남의 기록은 조선 말기 한국 불교의 어려운 현실을 증언해 주는 생생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글은 1874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에서 조선의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 살펴본 연구이다. 달레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직접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들의 서한과 기록들에 의지하여 책을 집필했다. 따라서 이 책에 비 친 조선의 불교는 달레 한 사람만의 인식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을 경험 한 서양 선교사들의 전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불교는 ‘예전 종교’로 서술되었다. 즉 현재의 불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존경을 잃고 쇠퇴한 모습일 뿐이며, 불교가 종교로서 누렸던 위상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인식이다. 선교사들이 본 사찰은 대부분 폐 허로 변했고, 승려는 부패했다. 종교인이었지만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지녔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불 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이 이 책 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천진암과 주어사라는 사찰을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서 성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에서 추앙하는 성인 중에 이벽과 권철신 등이 이 두 사찰에서 처음으로 서학 연구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오늘날 천주교와 불교계는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에 담긴 불교에 대한 내용은 선교사들의 부정적 인식 을 다룬 부분과 천진암・주어사와 관련한 논쟁 정도가 전부로서 분량이 매우 적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을 유추해낼 수 있다. 선교사들이 본 부정적인 모습에는 당시 승려들이 국가의 잡역에 시 달렸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그런 현실에서도 왕실에서 불사를 지원했던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사찰을 활용해 서학을 연구하는 모임을 가졌던 점도 조선 후기 사찰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 후기 사찰은 민간신앙을 포섭하면서 지역민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공간으 로 자리매김하였고, 유학자뿐만 아니라 천주교인도 거부감 없이 이용할 수 있었던 지역 사회 종교 문화의 거점이었다.
본 연구는 『하멜보고서』의 ‘1660년, 1661년, 그리고 1662년’에 실려 있는 ‘종교’ 부분에 대해석 작업이다. 이는 “데 스뻬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하여 불시착한 후 1666년 9월 5일까지 조선에서 경함한 것의 기록을 활용하고 있다. ‘종교’부분 기록 내용은 17 세기 조선의 불교와 의례, 조선 승려와 계율, 불교와 사찰 교육 그리고 불교 건축과 사원 관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불교의 식에 대한 유자들의 인식과 불교가 백성들의 죽음의례에 여전히 깊이 간 여하고 있고, 평소 그들이 절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상주권공이나 수륙재가 설행되는 풍경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생태적 음식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나 자신들의 조상을 위한 의례가 행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이 교육기능은 물론 사회복지기능도 하며 사찰의 고아들에 의해 사자상승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살펴보았 다. 또 불사의 권선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한 귀중 한 민족지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17세기 중엽 조선의 종교생활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사람이 쓴 최초의 조선에 대한 민족지(ethnography)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17세기 중엽 이후 일어나고 있었을 법한 조선의 유교문화의 전개양상과 견주어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불교와 불교 의식을 폐지하려는 유자들의 권력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서 민중들이 어 떻게 불교와 불교적 세계의 신앙을 영위했을까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실상은 청허당 서 산대사 휴정의 염불문과 의문(儀文)이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소비되는 맥락을 깊이 있게 천착할 수 있는 실증자료라고 생각된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전개될 조선 후기 유교의 종법질서에 입각한 『주자가례』와 문 중(門中)의 문화와 대비하여 개인과 가족, 각 마을의 민중들이 당면한 문 제를 해결하려는 종교적 실천행위에서 불교의례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다.
본 논문은 조선시대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을 중심으로 조선 왕실의 오 대산 신앙을 고찰한 연구이다. 조선시대 오대산에는 태종대부터 고종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왕실의 원당과 원불이 조성되었다. 태종대 태상왕 이성계의 사자암 중수, 세종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월정사 중창, 세조대 세조의 상원사 중창, 의숙공주의 원불 조성, 상의조씨의 영감암 중창, 선조대 영감사의 실록수호사찰 지정, 인조대 소현세 자를 위한 제석천상 중수, 고종대 국태민안을 발원하는 불상의 이운 등이 이어 졌다.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의 성격은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대산에 대한 조선 왕실의 깊은 신앙심이 원당 설치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명산에 기도처를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발원하던 오랜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보살상주 신앙으로 변화하였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 하는 기도처를 오대산에 지속적으로 설치하였다. 둘째, 천재지변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처가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고대부터 국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왕실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산천단묘에서 제사를 지내던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대부분 사찰로 흡수되었다. 특히 오대산과 금강산, 태백산과 같은 명산들은 국가 주도의 소재법석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명소였다. 셋째, 요절하거나 병든 왕실구성원을 위로하기 위한 원당과 원불이 계속 조 성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실의례가 유교식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차원의 추천불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특히 젊 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안타까운 사연으로 사망한 왕실구성원을 위한 원당은 조선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오대산은 신라시대에는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비보사 찰로 숭앙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로 유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고대부터 이어진 오대산 신앙을 계승하여 왕조가 지속되는 내내 국가 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기도처를 운영하였다.
This is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the Heungcheon-Temple. The results are follows. 1) The Heungcheon-Temple was anticipated to be the Jeongneung. However, when completed, the Heungcheon-Temple was symbolized Buddhism; moreover, there was a stupa enshrined sarira. The stupa was a land mark in Hanyang. While king Sejong repaired the stupa, it disappeared during the regin of King Jungjong. Before it disappeared the stupa signified a Buddhist event and a rite of good fortune. 2) The stupa was constructed using a double-frame, and there was a stone-stupa in an octagonal multi-layer temple. This single location consisted of a sarira space and a worship space. 3) Buddhist Relic(Sarira) worship was to witness holiness and therefore reics could be moved according to need. It appeared as though Buddhist Relic worship occurred in Southeast Asia. 4) The Heungcheon-Temple stupa was considered a new and superior architectural-symbol to comfort people and recognize the new order of Ming and neo-Confucianism. Therefore, the stupa was a good alternative to politics, religion, and external relations during the early Joseon era.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불교탄압과 유교진흥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조선후기 승려들의 각종 부역동원의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승려 들의 산성방어와 각종 토산물의 생산과 상납이 불교계에 대한 수탈 과 착취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와 인식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살펴보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인구감소, 자연 재해, 대규모 기근, 농토의 황폐화 등으로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었 다. 급기야 조선정부는 백성들의 전세(田稅)·공물(貢物)·역(役)의 부담을 완화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대동법이나 균역법의 시행은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책이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백성들 의 부담을 떠안은 승려들의 곤궁함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향상되지 못했다. 균역법의 시행 이후 승려들의 부역동 원도 점차 금지되었고 완화되었다. 요컨대 조선후기 경제상황과 수취체제의 시행은 승려들이 맹목적 인 수탈과 착취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불교탄압의 사례로 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