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國詩話彙成』은 18세기에 저술된 인물중심의 총집류로 시화사적 면에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현재 22권 7책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고려 뒷부분과 조선 앞부분에 권수의 숫자가 중복되기도 하고, 異本 중 비교 적 체재를 갖춘 『詩話彙成』과『詩話彙編』조차 결락본이거나 불분권 상태이다. 세 필사본의 간행 시기는 『동국시화휘성』이 洪重寅에 의해 먼저 편 찬되었고 그 얼마 뒤인 1734년에 洪重徵 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초기『시화휘성』으로 정리되었다고 보여진다.『시화휘편』은 1817년 沈魯 崇이 홍중인의 손자 집에 보관되어있던 『시화휘성』을 傳寫해두었다가 1821년 『대동패림』편찬 시 최종 수록하였다. 필사본의 한계로 인해 체재가 정밀하지 못하고 결락된 부분도 많으며, 편찬시기에 시간차가 있어서인지 선입된 조목에 있어서 서로 출입이 발견되었다. 이에 본고는 가장 처음 편찬되었고 비교적 체계가 갖추어진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3종의 편찬체재를 대조하고 그 결과를 표로 정리 한 후, 그 가시적인 차이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동국시화휘성』·『시화휘성』·『시화휘편』의 선입조목을 비교하여 그 현황을 살펴보았다. 『시화휘성』은 앞서 편찬된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인물 및 시 일화를 가감하였고, 다른 부분은 기존의 체재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지만 조선조에서 왕들을 별도 조목으로 분류해둔 현상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제시하였다.『시화휘편』은 심노숭이 말한 필사경위나 편찬시기 및 조목의 1차적 인물선입 양상만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는 『시화휘성』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3종에 공통으로 선입된 조목의 기사를 서로 비교해본 결과 후대에 필사된 『시화휘편』이 체재 면에 서는 오히려 『동국시화휘성』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시화휘편』은 선행 저작된 두 필사본을 함께 참고하였거나 적어도 심노숭이 저본으로 삼았던 시화휘성』은 현존본과는 다른 『동국시화휘성』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초기 형태의 『시화휘성』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본고는 3종을 종합하여 『동국시화휘성』의 완전한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동국시화휘성』이 갖는 독자적 의미를 도출하기 위한 선행연구로서의 기초 작업임을 밝힌다.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The most influential figure, both in political and academical terms, in the period of the latter half of and the entire run of King SunJo's and GwangHaeGoon's respective regimes, was the Head of the Northern Faction at the time, RaeAhm Jung In-Hong. He was renowned as the most prominent figure of the Northern Faction during GwangHaeGoon's regime for his distinctive records of political actions and services, which included his taking initiatives back in the ImJin war crisis, his social background in the GyungSang WooDo area, his legitimate status in the academic society granted by his being one of Joe, Sik's disciples, and his unwavering loyalty for the King GwangHaeGoon. But his radical, straightforward attitude and political perspectives forced the opposing political parties to stand against him. He also promoted the cherishing project for his mentor Joe, Sik in a great hurry, which was also against the general consensus and wishes of the scholars. Hence, he became the primary target of the leaders of the revolution which had InJo as the new King, and was executed in the aftermath eventually. There were indeed some redeeming qualities in his life. He firmly maintained his principles of being loyal to the country, to the King, and to his mentor, although he had probably gone too far when he criticised TwaeGwae Lee, Hwang, or when he excessively insisted the executions of the convicted traitors to the country, in the process. Yet it is true that there have been too much of negative sentimentality and too many criticisms against him, which was in part actually engineered by the opposing Western Faction politicians at the time, who generally named him a rogue traitor. What was true, however, was htat he had also demonstrated certain personal principles and outright determination to stick to that principles throughout his entire life, which was also a typical trait for the Chosun SanRim scholars. More rational and reasonable evaluations of the character would be recommendable in the futrue. Efforts like that might also be instrumental in defining the political and academical position the Northern Wing personnels deserved to occupy in the history of the Chosun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