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의 형태를 띠고 있는 「우인효자군만전」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말이며, 저자는 여말선초 성리학자 및 정치인으로 잘 알려진 권근이다. 그는 증조부 권보와 조부 권준이 편찬한 『효행록』에 후서와 주해를 쓴 것으로 보아 유학 에 대한 박식함과 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우인효자군만전」보다 앞서 발행되었던 설화형태의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 「효선편」에서 표현하는 효개념은 「우인효자군만전」에서 표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효를 서술함에 있어 설화와 전에서 표현하는 양상에서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며, 이를 위해 구성적, 기술적, 논리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예정이다. 효행설화에서 효를 부각시켰던 방법은 주로 중국인을 각색한 주인공이 연로하거나 병약한 부모님을 대상으로 효행하는 서정적 분위기와 효행은 곧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내용이었다. 반면 「우인효자군만전」에서는 주인공 설정의 탈중국화, 효행대상자인 부모 가 노약하거나 병약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탈서정화, 효행을 하면 복을 받거나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결론에서 벗어난 탈기복화로 기술(記述) 적 표현이 발전되었으며, 이에 따라 효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우인효자군만전」에서 언급한 불효 10죄가 『효경』, 『명심보감』, 『맹자』 그리고 고려율을 적용했을 때 명백한 불효임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는 효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척도구로 불효를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려말 「우인효자군만전」에 시도된 새로운 양상들은 조선시대 『삼강행실도』의 발행에 등장인물과 발간목적에 영향을 준 동기가 되었으리라 사료되며, 새롭게 시도된 표현방식과 문헌을 통한 논리적 근거를 이용해 효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말선초 관음보살상 중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취하는 좌법으로 알려진 윤왕좌(輪 王坐, Maharaja-lila 또는 Rājalilāsana)를 취하고 있는 조각이 다수 확인된다. 기존의 불교조각사에서 제작된 바 없는 작례로서 활발한 대외교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 시대 관음신앙을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윤왕좌를 취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의 도 상을 살펴보면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 상주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중국 송대 제작된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에서 그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윤왕좌를 취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은 여말선초 불교조각의 양식사적 흐름위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통일신라 양식을 기반으로 외래양식을 적절히 수용한 전통양식과 원․명대의 독특한 티베트계 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제작경향을 살펴보면 소형의 호지불상(護持 佛象)이나 경상(鏡像)과 같은 휴대용 불교용구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어 독특하다. 이들은 제난구제(諸難救濟)나 안산(安産) 등 현세이익적인 원(願)이나 정토로 향하고 싶은 내세에 관 한 염원을 담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려말선초 혼란기에 불교는 타락하고 활발했던 조영의 분위기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 사찰건축의 명맥을 유지된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건물짓는 기술자가 바로 승장 대목 자신들이라는 점과 혼란기를 틈타 엄격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스럽게 영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건물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사찰 전각 측면공포에 대한 등간격배열방식이다.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심도갚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규정짓는 자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