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비디오 아트에서의 투영된 이미지의 발전과 스크린-매개 설치 미술에서 최근의 프로젝션-기반 뉴 미디어 아트로의 프로젝션 개념의 전이와 관객성의 변모된 양상을 분석했다. 스크린-매개 설치미술에서의 관객성의 공간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다원화되었고 컴퓨터 네트워크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공간적 관계성과 함께 복잡하고 잠재적으로 불안정한 관람 유형이 초래되었다. 디지털 프로젝션의 개념은 이미지 투영을 넘어서 데이터 투영을 통한 다중적 감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전이, 확장되며 상호작용성을 재고하게 한다. 또한 프로젝션 기반 뉴 미디어 아트는 스크린-접속 영역에서의 공동체 형성에 관한 논의를 유도하며 사회적 문맥을 취하는 예술적 실천으로 집단적인 의미를 정립해내는 관계적 논리에서의 관객성을 촉진한다.
본 연구는 르네상스 초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해부학에 대한 문화적 관점과 1490년대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해부학 서적의 삽화들을 토대로 미술과 의학의 상호 연관성을 분석한다. 의학 분야는 해부학을 통해 경험을 보편적인 지식으로 구성해갔지만 당시 해부학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도움을 받아 기존 예술품을 차용해서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고 도상학적 지식을 함께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와 예술가는 모두 개체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사유 구조를 공유할 수 있었고, 예술가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표현을 확장해갈 수 있었다. 이런 점은 매너리즘 이후 아카데미의 설립 과정에서 진행된 해부학의 논쟁이나 바르톨로메오 파세로티의 <해부학 수업>의 사례에서처럼 유파의 분류 기준으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해부학 전문 서적의 삽화들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문화적 사유 구조를 바탕으로 각 분야의 독립적 담론을 구성하고 학문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개편된다. 일본의 경우, 이 전쟁은 明治시대의「국체」를 확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근대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암시하는「支那」로 위치가 격하되었고, 일본은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의존해 왔던 중화적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支那를 보급시켰다. 16세기「선교의학」이었던 서양의학은 제국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위생제국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森鷗外와 魯迅은 이것의 가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동양의 선두인 일본의 森鷗外도 나우만에게서는「他者化」된 오리엔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 확인된다. 森鷗外 자신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우만에 의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야만이라는 가치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森鷗外는 서양과 동등해지고자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强辯했다. 나우만은 서양의 눈으로 동양의 선두 일본을 마음껏 조롱하고, 그 衰滅을 예고한다. 하지만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총력적인 明治政府의 지원 아래 森鷗外의 과학적 위생국가 건설의 꿈은 점차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文學者 ․ 軍醫 ․ 衛生學者인 森鷗外가 서양과「同等」해지기 위해 전투적으로 분신하는 모습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의학도 魯迅은 醫專 在學 도중, 자신의 역할에서 근대의학 효용의 한계를 깨닫고 문학으로 전환한다. 이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장소로서 仙台醫專이며, 時期로서 러일전쟁이, 후지노와 周樹人의 인연을 엮어내고 있었다. 支那人 의학도와 日本人 선생의 만남은 20여년 후 국책소설《惜別》을 낳게 되고, 文學報國會는 太宰治를 통해, 40여 년 전의 침략자의 施惠를 추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仙台는 제국주의 실현의 한 장으로 볼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中日親善을 목적으로 그 추억은 이어지고 있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周樹人의 자아 비판적 회심은 혁명가 魯迅에게 정치적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지만, 魯迅으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는 끊임없이 중도에 그만둔 근대 의학의 역할을 차용케 한다. 즉 魯迅은 누구보다도 근대 의학의 정치적 효력을 알고 있었고 근대문명을 수행하는 이가 의사임을 깨닫고 있었다. 위생 제국 건설에 전투적으로 이바지 한 森鷗外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발아한 서구자유주의 사상과 문학 창작에 대한 욕구 등은 제국주의 현실에 회의를 품게 했다. 이러한 間隙을 그는 문학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이는 혁명가 魯迅이 정치적 변화를 문학이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따라서 근대 서양의학은 선교사를 따라 또는 식민지 개척자를 따라, 물리적 국경을 넘어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과학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적 발전 그 자체가 권력이 되었다. 의학적 지식 그 자체가 권력화 되고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월경해 가는 것을 森鷗外와 魯迅의 생애와 유학체험의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