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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개편된다. 일본의 경우, 이 전쟁은 明治시대의「국체」를 확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근대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암시하는「支那」로 위치가 격하되었고, 일본은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의존해 왔던 중화적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支那를 보급시켰다. 16세기「선교의학」이었던 서양의학은 제국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위생제국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森鷗外와 魯迅은 이것의 가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동양의 선두인 일본의 森鷗外도 나우만에게서는「他者化」된 오리엔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 확인된다. 森鷗外 자신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우만에 의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야만이라는 가치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森鷗外는 서양과 동등해지고자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强辯했다. 나우만은 서양의 눈으로 동양의 선두 일본을 마음껏 조롱하고, 그 衰滅을 예고한다. 하지만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총력적인 明治政府의 지원 아래 森鷗外의 과학적 위생국가 건설의 꿈은 점차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文學者 ․ 軍醫 ․ 衛生學者인 森鷗外가 서양과「同等」해지기 위해 전투적으로 분신하는 모습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의학도 魯迅은 醫專 在學 도중, 자신의 역할에서 근대의학 효용의 한계를 깨닫고 문학으로 전환한다. 이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장소로서 仙台醫專이며, 時期로서 러일전쟁이, 후지노와 周樹人의 인연을 엮어내고 있었다. 支那人 의학도와 日本人 선생의 만남은 20여년 후 국책소설《惜別》을 낳게 되고, 文學報國會는 太宰治를 통해, 40여 년 전의 침략자의 施惠를 추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仙台는 제국주의 실현의 한 장으로 볼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中日親善을 목적으로 그 추억은 이어지고 있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周樹人의 자아 비판적 회심은 혁명가 魯迅에게 정치적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지만, 魯迅으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는 끊임없이 중도에 그만둔 근대 의학의 역할을 차용케 한다. 즉 魯迅은 누구보다도 근대 의학의 정치적 효력을 알고 있었고 근대문명을 수행하는 이가 의사임을 깨닫고 있었다. 위생 제국 건설에 전투적으로 이바지 한 森鷗外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발아한 서구자유주의 사상과 문학 창작에 대한 욕구 등은 제국주의 현실에 회의를 품게 했다. 이러한 間隙을 그는 문학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이는 혁명가 魯迅이 정치적 변화를 문학이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따라서 근대 서양의학은 선교사를 따라 또는 식민지 개척자를 따라, 물리적 국경을 넘어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과학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적 발전 그 자체가 권력이 되었다. 의학적 지식 그 자체가 권력화 되고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월경해 가는 것을 森鷗外와 魯迅의 생애와 유학체험의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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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논자가 분석ㆍ점검한 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봇짱이 공부했던 메이지시대의 물리학교는 낙제를 하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이 10% 전후로 입학은 쉬웠으나 졸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학교였다. 실력이 모자라는 학생에게 엄격한 학칙을 적용하여 낙제를 시키고 있었던 물리학교를 공부에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닌 봇짱이 3년간 학교를 다니자 그냥 졸업하라고 해서 불평하지 않고 졸업해 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가 당시 물리학교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작품에 묘사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작자의 의도된 유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본인 특유의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최대한 낮추어 말하는 표현 방법 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메이지시대 말경에 일본정부가 인정하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여 스미토모총본점에 입사한 사람의 급료가 40엔, 경시청 순사의 급료도 10∼13엔 정도였던 것을 고려해볼 때, 봇짱이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시코쿠 지방에 있는 중학교에 수학 교사로 취직을 하여 40엔이라고 하는 급료를 받은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교사로 취직하여 초임금 40엔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교직사회에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던 물리학교 출신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일본의 근대시대에는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급료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가 났던 시대였다. 메이지 정부가 인정하는 제국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급료를 많이 받고 고급관리와 관리직 등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학벌에 의한 급료의 차이, 신분의 벽을 만들어 제국대학에 못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열등감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국대학 출신은 학문적으로는 우수했을지 몰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인성적인 면까지 우수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벌사회의 권력화에 대한 어두운 이면이《도련님》에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봇짱은 자신도 물리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중간 엘리트의 학벌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대학 출신의 슈퍼(super) 엘리트 학벌 소지자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대학 출신 교감 선생과 충동적으로 대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고 점차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일본 근대의 독특한 학벌이라는 사회제도가 존재하는 시대에 봇짱이 제국대학 출신인 아카샤쓰를 강자로 인정하지 않고 불신임하고, 충돌하려 했던 것은 필연적으로 좌절과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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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현대문예이론의 기준으로 梁啓超의 소설이론을 평가하면, 梁啓超의 소설에 대한 인식은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매우 분명한 논리적 허점이 있어, 수많은 이론상의 오해와 논리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객관적 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이론이 시대의 최선봉에 선 것임은 분명하다. 심지어는 문장 속의 어떤 오해와 과장에는 말살할 수 없는 역사적 소명의식이 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梁啓超가 제창한 소설이론은 중국근대문학의 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했다. 첫째, 소설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론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이론의 최고 수준이었다. 둘째, 줄곧 그 지위가 낮았던 중국의 소설을 “文學之最上乘”의 지위로까지 끌어 올렸다. 셋째, 그는 형식면에서, 신문이나 잡지에 이론을 발표함으로서, 중국의 문예비평방법인 評點이나 序跋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근대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넷째, 그 결과 소설이론이 구체적 작품으로부터 분리되어 문학의 일반론이나 서사방법 등 이론성 문장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방법론면에서 근대소설이론으로 발전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소설계혁명”의 실제효과를 보면, 梁啓超이론의 부정적 효과도 너무나 분명하여 간과할 수는 없다. 첫째, 소설과 사회의 관계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소설이 그 본래의 독립적 품격을 상실하고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둘째, 소설과 사회라는 외부관계만을 일방적으로 중시하여 서사방법·인물의 전형화이론·사건의 형상화이론 등과 같은 소설내부의 예술문제 등을 홀시하여 중국의 고전소설이 근대소설로 정상적인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청말(만청)에 이렇게 많은 창작이 쏟아져 나와 소설의 전성기를 구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문학연구자들의 공통된 평가이다. 이러한 양과 질의 불균형 현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갑작스런 양의 증대현상이 질적 향상을 담보할 수는 없었으며, 이런 양적 증가의 원인이 비문학적 요소인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梁啓超와 그의 소설이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계초는 자신이 주장한 “소설계혁명”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유일한 소설창작인《新中國未來記》를 창작하였으나, 겨우 5회를 쓰고 나서 스스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실패는 서언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실천만이 이론을 검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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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상으로 한ㆍ중ㆍ일 삼국의 대표적 자전체 작가인 이상과 郁達夫, 太宰治의 작품에 나타난 공간의 특징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작가들의 특정 작품, 즉〈날개〉(이상),〈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郁達夫),〈광대의 꽃〉(太宰治)에 공통적으로 땅콩껍질과 같은 특별하게 분할된 공간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 고찰은 시작되었다. 그 공간은 거주자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삐걱인다는 점에서 가장 큰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근대성의 개념으로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들의 작품에 나타난 공통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문의 기능이 상실된 공간. 이들 작품에는 대문이 언제나 열려 있거나 아예 없는 집이 그려진다. 이렇게 대문이 적절한 기능--방어와 소통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 모두가 하나로 만나는 마당을 구성하지 못한다. 둘째, 대문과 마당의 부재로 인해 방이 마당, 혹은 거리가 된다. 방에 숨을 수 없게 된 주인공들은 여기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그 뒤에 숨은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자폐적 도피로서 자아를 확인할 거울을 상실하는 일이기도 하다. 셋째, 광장도 없고, 신도 없는 밀실에서 개인이 견딜 수 있는 길은 없다. 따라서 소설의 인물들은 자아를 비춰볼 대상을 찾아 외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 관계 중심의 세계는 자아의 실체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버렸던 공간이기도 하다. 개인의 태도에 변화가 없이 똑같은 공간의 의미가 달라질 수는 없다. 넷째,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자살충동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의 공통점 외에 차이점도 발견된다. 첫째,〈날개〉에는 형식적으로 완비된 공간이 제시된다. 그래서 그 노출은 형식적, 내용적으로 철저하며 그것은 당시 일제의 전일적 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비해〈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의 공간은 반쪽짜리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우리’의 공간이 주는 위안이 있다. 중국의 반식민지적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마지막으로〈광대의 꽃〉의 공간은 내부적으로 복잡하게 구획되어 있다. 지식인의 고민이 외부를 상정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적 자기동력하에 진행되고 있었던 당시 일본의 상황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른 장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데, 이것은 결국 개인, 혹은 동양 삼국의 지식인들이 체험한 자아에 대한 고민이 그 정도와 방향에 있어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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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노신과 이광수의 1910년대 유학 시절의 체험과 이후 그러한 체험이 소설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지를 몇 가지 공통되는 큰 주제 아래 그 차이와 동질성을 살펴보았다. 이번 발표문을 일단 마무리하면서 차후 보완해야 하고 또한 이번 논문과 연결하여 새로운 논문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필자 스스로 생각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번 발표문을 보완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실증적인 자료(지금 현 상황에서 사실 유학 시절의 새로운 자료를 찾는 것이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를 찾고 분석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자료를 찾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들의 유학 시절의 독서 체험(그에 대한 목록이나 그 영향 관계에 관한 논문은 적지 않지만)과 문화 체험(이에 대해선 좀 더 현지답사라든가 실증적인 자료 발굴과 분석이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보며 그러한 작업을 차후 해나갈 계획으로 있다)에 대한 분석도 보충이 되어, 그들의 유학 체험에 대한 단순 비교가 아니라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인식을 통한 동아시아 근대 담론의 형성이라는 큰 주제에 보다 적절한 소논문을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노신과 이광수 두 작가 모두 유학 시절 문학에 뜻을 두었고, 그 문학을 통해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문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 유명한 환등 사건, 노신을 의학에서 문학으로 결정적으로 옮겨가게 만든 그 사건이나 이광수가 메이지 학원 시절, 러일 전쟁의 경험과 톨스토이주의에 경도하면서 민족 계몽으로서의 문학에 눈을 뜨고 1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기차칸에서 겪었던 사건으로 더욱 민족 계몽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사건 등에서 근대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문인이었던 두 사람의 공통적 운명과 시대 상황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새삼 떠오른다. 중국문학 내에서의 노신의 초기 사상에 관한 연구나 한국문학에서의 이광수의 초기 사상 연구는 상당히 진척이 되어 있으나 두 작가의 사상에 관한 비교 및 그를 통한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의 근대 인식에 관한 총체적 연구는 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차후 연속 연구 과제로 두 작가의 유학 시절 체험과 초기 논설을 중심으로 한 비교 분석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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