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서양고지도에 표시된 ‘달의 산맥’의 지리적 위치와 시대별 위치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세부터 ‘달의 산맥’이 지도에서 사라진 19세기말까지 간행된 지도를 조사하여, 시대별 특성을 정리했다. 조사 결과 1320년 이전에 는 나일강 수원은 오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지도상에 표시되었고, ‘달의 산맥’은 나일강 수원으로 표시되지 않았다. 1321년 이후에 야 이슬람 지도의 영향으로 ‘달의 산맥’이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한 경위도 좌표에 ‘달의 산맥’을 표기된 지도가 다수를 차지함을 확인했다. 이후 이슬람 여행자들에 의해 수집한 일차자료를 반영하여, 달의 산맥’의 위치를 변경시 킨 지도가 등장했으며, ‘달의 산맥’ 정상에 지상낙원을 배치하기도 했다. 계몽시대의 지리학자들은 ‘달의 산맥’을 지도에서 삭제했으 나, 19세기에는 콩 산맥과 이어지는 거대한 아프리카 횡단 산맥으로 지도에 표현되었음을 확인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서양고지도에 표시된 사티로룸의 지리적 위치와 시대별 위치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괴물인간 인 사티로스의 성격과 거주지인 사티로룸이 위치하는 장소에 대한 문헌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13세기에서 18세기 까지 제작된 지도를 조사하여, 사티로룸의 위치를 분류하고, 그 의미를 파악했다. 분석 결과 중세지도에는 에티오피아에 사티로룸이 위치하는 데, 이는 중세의 공간도식에 의하면 전형적인 타자의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 초반에는 동남아시아로 사티로룸이 옮겨 갔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언급된 좌표에 의한 것이다. 이후 메르카토르와 오르텔리우스는 일본 북쪽의 섬으로 사티로룸을 이전시켰다. 그리고 니콜라 상송은 제주도를 사티로룸으로 지칭했다. 그렇지만 니콜라 상송의 지도는 역사지도이므로 이를 동아시아에 대한 타자화의 전형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서양고지도와 황조일통여지전도를 통해 조선의 북방영토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서양고지도에 표시된 조청경계의 유형을 분석하고,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18세기에 제작된 서양고지도의 경우는 간도와 같이 확실한 정치적 통제가 되지 않았던 지역의 경계 표시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상당한 취약점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황조일통여 지전도는 1885년의 감계회담에서는 청나라에 의해 토문강과 두만강이 동일한 강이라는 근거자료로 사용되었지만, 1887년 회담에서는 이중하에 의해 두만강 발원지가 홍토수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재는 홍토수가 북한과 중국과의 경계선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고지도를 북방영토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함을 확인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고지도의 동해 명칭 표기 사항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프랑스 국립도서관 이 소장한 고지도 중 동해가 표기될 가능성이 있는 지도의 목록을 추출하였고, 이들 지도를 조사하여 이들 지도에 표기된 바다 이름을 조사하였다. 둘째, 이들 지도에 표기된 동해 명칭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사결과 1500년대와 1600년대에는 동해가 중국해로 표기되었다. 1600년대의 지도 중 니호프(Niehoff)의 지도가 동해를 한국해인 ‘mare coreum’으로 표기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서양해와 반대되는 의미인 동양해의 의미인 ‘mer orientale’ 이 점차적으로 중국해 쪽으로 이동해 옴을 발견하였다. 1700년 대 지도는 약 58%의 지도가 한국해 명칭으로 동해를 단독 표기하였다. 1700년대 중후반의 지도 중 일부는 현재의 동해를 소동양해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라페루즈 해도 발간이후인 1800년대의 지도는 90%이상이 일본해로 표기하였다. 연구 결과 개별 도서관의 소장 지도를 전부 파악하여 동해 표기 사항을 양적으로 계량화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지도 80만장, 아틀라스 1만부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의 양적인 접근은 표본추출과 관련한 오류를 유발한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지도에서는 일본해 명칭의 빈도수가 압도적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동해 명칭 근거를 양적인 측면에서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지도의 중요성을 고려한 질적인 접근을 병행하여야 하며, 이를 고려한 논리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홋카이도와 주변지역에 대한 유럽인들의 탐사와 지도 작업은 유럽인들의 동해와 한반도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16세기와 17세기의 서양고지도에 나타난 이 지역의 표현 형태를 논의하였다. 16세기까지는 이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적 인식 수준은 매우 미약하여 일본만 태평양 한 가운데에 표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Angelis의 지도가 1621년 제작됨으로 홋카이도의 지도 제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Dudley는 Angelis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홋카이도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한반도와 홋카이도 의 상대적 위치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17세기 중반에는 Vries의 탐사 결과 쿠릴 열도의 한 섬을 아메리카와 동일시하게 되는 오류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이후 이 지역의 지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Vries 이후의 이 지역의 표현 형태를 여섯 가지 범주로 유형화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Vries의 탐사와는 별도로 지도 오류의 원인을 Kaempfe가 유럽에 가져간 지도를 근거로 하여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