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는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감리교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여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부문의 개신교 선교를 윤허 받은 1884년 이후 지난 141년 동안 급격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개신교의 분열과 갈등은 여전 히 한국개신교가 풀어야 하는 숙제이다. 188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된 한국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성서번역에 있어서 협력하는 차원에 머물렀지만, 1905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선교 연합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시작으로 한국 토착적인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one native evangelical church)를 설립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1905년 시작된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 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하나의 토착적인 복음주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시도했던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이것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를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사분오열된 한국 개신교회와 그들이 파송한 각 교단 한인 선교사들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기를 바란다.
This study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orean Language Institute (KLI), established at Yonsei University after 1959, and the Korea Inter-Mission Language Committee (KIMLC), which represented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at the time. The existence of the KIMLC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KLI had not been reported until now. The evidence for this study is primarily found in records collected from the archives of the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These records indicate that the KIMLC was the successor to the Yonsei Language School Consultation Committee, which was responsible for establishment of the Korean Language Institute at Yonsei University and qualified as the official agent for Korean language learning for missionaries. Futhermore, I discovered that KIMLC was actively involved with KLI through the mid-1960s, advising, participating in, and auditing KLI's Korean language programs. Moreover, from the late 1960s onward, as KLI expanded its language education programs, the KIMLC's role in teaching Korean to missionaries diminished, thus allowing KLI to develop into a more independent institution.
19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비 해서 그들의 선교가 여러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식하 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개신교회가 ‘성서의 종교’ 임을 강조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성서를 보 급하는 일에 노력하였는데 이는 개신교 선교부의 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 전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초기에는 ‘선교보호권’(宣敎保 護權)을 중심으로, 1622년부터는 포교성성(布敎聖省)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및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및 중국선교를 수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발적 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또는 강력한 교회중심체제로부터 벗어나 선교를 수행하였다. 일부의 현 상이나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선점한 중국에서 그리고 당시 직접적 복 음전도의 자유가 없던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의 최선의 전략은 성서원 문으로부터의 성서번역과 보급이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자신들 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로버트 모리슨의 번역본을 시작으로 첫 100여년동안 8개의 다른 중국어번역본을 출판한 개신교의 열정이 그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대립되는 성서판본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회의 불일치성은 오늘날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