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기 왜⋅신라⋅당나라에서 즉위한 스이코(椎古)・선덕(善德)⋅무측천 (武測天) 세 여성 통치자의 등극은 동아시아 정치사에서 드문 현상이다. 이들 의 집권은 삼국 모두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시점에서 진행 되었는데, 본고는 이를 불교(佛)-문화(文)-율령(律)’의 키워드로 접근하였다. 즉 문명의 환상선을 이룬 동아시아에서 도미노처럼 이어진 불교의 성행, 문화의 개방, 율령의 시행을 통해 조성된 정치균형과 경제발전, 젠더 프리의 분위기 가 여왕의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국의 신앙체 계와 혈통적 관습, 탄력적 외교와 선진적 도약에의 열망이 유의미하게 작용했 음을 고찰하였다. 민중의 무의식을 지배해온 민간신앙의 여성 신성은 불교에 서 관음보살 형상으로 재현되며 여성 신자의 증가 및 여성 통치자 등극의 당 위성을 견인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구세력과의 결별을 요하는 시대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통치자의 권위를 법제화하는 시스템, 즉 율령의 완비로 연결된다. 율령은 통치자의 권위를 ‘국가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작업이자 왕권 중심의 중앙국가 성립의 이정표로서 의미가 있다. 그런즉 스이코⋅선덕⋅무측천 세 여왕의 등극과 치세는 ‘불교-문화-율령’의 코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도출해 낸 원인이자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여성의 통치 미학, 즉 소 프트 리더십이 6-7세기 동아시아 정치가 힘과 위계의 확장기로부터 치세와 번영의 안정기로 접어드는데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During her time as Emperor of the Tang Dynasty, Wu Ze Tian created a number of new characters. Later generations called them “Wu Queen New Characters”, and some also called “Ze Tian Characters” and “Ze Tian Xin Characters.” Since the Tang Dynasty, although many scholars have studied the writing methods, word counts, and circulation areas of new characters, there are many different opinions, especially about the number of new characters and that of glyphs, which makes future studies much more difficult and impossible to restore the original appearance at that time. In addition, the timing of the promulgation of each new word is hardly recorded in the classics, and it is difficult to know the actual use of the word and the circulation situation. Therefore, this article uses Collection of Epitaph of Tang Dynasty, Sequel Collection of the Epitaph of Tang Dynasty, Collection of Epitaph of Tang Dynasty and Research, and Beijing Library Collection of Stone Carving of Each Chinese Generation etc. to set the age of the research material from “Zai Chu” first year (A.D.689) to the end of “Chang An” fourth year (A.D.704), 16 years in total, 422 piece of epitaphs. They are arranged according to the grave owner’s burial time, sorting out Queen Wu’s implementation process for new words, actual use of new words, word count, and word font, and staging and spread area. By means of this, the article makes the appearance of Queen Wu’s new words possible, even further presented in front of everyone, and finally making a new investigation for the Queen Wu’s new words.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궁중비사(宮中秘事)를 제재로 만든 사극 드라마나 소설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흥행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형성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 작품들 궁중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또한 등장인물들도 모두 실존했던 역사 인물들을 재창작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본고에서는 이렇게 주목을 받아온 궁중인물 중의 대표자인 선덕여왕과 무측천의 이미지가 문학 작품에서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고 당나라 때의 무측천은 중국 유일한 여황제이다. 이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에 묘사된 바가 있다.지기삼사(知幾三事) 설화와 지귀 설화는 선덕여왕의 이야기를 담은 대표적인 설화이다. 이 설화들에는 선덕여왕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선덕여왕은 비록 몸은 여자이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남자 못지않은 능력과 기개가 있다. 뿐만 아니가 그의 덕목과 아름다움, 현명함, 신성성, 그리고 여자로서의 인간미까지 이 설화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선덕여왕에 대한 혹평은 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김시습의 시 <善德王陵(선덕왕릉)>에서 찾을 수 있다.무측천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이자 조예 깊은 문학가였다. 그의 <여의낭(如意娘)>에서는 부드러운 여심(女心)을 표출하였다. 그리고 <종가행사림사(從駕幸少林寺)>는 무측천의 한 인간으로서의 인간미와 부모의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었다. <납일선조행상원(臘日宣詔幸上苑)>은 무측천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여황제로서 세상만물을 본인의 뜻에 복종시키려는 결단적인 기개를 묘사하였다. 측천의 인재에 대한 인애와 베풂의 마음은 당나라 우숙(牛肅)이 쓴 소설 <소무명(蘇無名)>에서도 잘 드러내었다. 무측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명․ 청대 창작된 <여의군전(如意君傳)>, <재화선(載花船)>, <무측천외사(武則天外史)>, <당궁춘무측천(唐宮春武則天)>, <농정쾌사(濃情快史)> 등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무측천은 음탕한 여자로 등장하였다. <경화연(鏡花緣)>은 명․청대 창작된 무측천을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소수 작품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