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지고의 의식을 분출하고 감싸고 그것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은 현상 세계의 실증된 경험이 초래하는 모순과 분열을 정복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강하고 단호한 의지를 예상하고 전제한다. 우파니샤드는 비이원성과 이원성을 번성하는 절대자의 형태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동일한 절대자의 창조적 본능과 창조적 의지의 결과이다. 따라서 정확히 세계 그 자체인 시초가 있지만 지고의 종말이 있으며, 시초부터 종말까지의 움직임이나 진행은 때때로 현전의 방식에서 그러하듯이 명백히 어려움을 겪으며, 다른 경우에는 확인된 부재로 성취된다. 그 정도에 이르기까지 끈기, 인내, 추측, 명상 등의 상태가 존재한다. 사무엘 베켓의 예술적 기교에서 그러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은 그의 소설과 드라마에서 등장인물, 상황, 행동, 사건 및 관계가 이 세상의 모순과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등장인물들은 압도되는 모습을 보이며, 부재하는 초월적인 것에서 안도감을 찾는다. 실제와 외견은 모순되고 실제는 이해의 필요성에 따라 확장된다. 우파니샤드는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는데, 베켓은 그러한 신념체계를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사무엘 베케트가 바라본 현실은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것들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베케트는 기존의 언어, 시간, 그리고 공간에 대한 해체를 통해 부조리 한 세상을 표현한다. 논리에 맞지 않는 대화, 욕설, 그리고 침묵 등과 같은 탈규 범적 언어사용은 관객들에게 낯설음을 선사한다. 소리에 불과한 대화와 긴 침묵 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은 기다림과 망각으로 점철된 멈춰진 시간에 갇혀있다. 정지된 시간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공간의 경계마저 불분명하게 만든다. 파편적 시간의 흐름과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공간의 경계는 도래하는 구원자에 대한 정보수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희망은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도 직접적으로 전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와 시공간을 재배치하여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숙고하게 만든다.
서구문학사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사무엘 베케트의 『막판』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작품 속에서의 풍부한 성경적 인유의 의미를 간과해온 측면이 있고, 주로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실존에 대한 부조리성이나 혹은 현대인의 삶에 대한 풍자적 관점만을 다루어져온 측면이 있다. 고등 문학비평 이론의 홍수 속에 “문학과 종교” 연구가들이 작품 속의 종교적 의미를 밝혀냄에 있어 위축된 측면이 있었지만, 디오도 아도르노, 질 들뢰즈, 알랭바디우 등과 같은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정성,” “리좀,” “유적인 것” 등의 개념을 통하여 베케트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베케트 작품에 나오는 “부정적 특질”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베케트의 특별한 글쓰기의 전략임을 알 필요가 있다. 『막판』에서 보이는 “부정적 특질”은 풍부한 성경적 인유에 의해 제시되는 종말론적 비전으로서의 파루시아에 대한 가능성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잭 예이츠는 W. B. 예이츠의 동생이다. 잭은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작가 잭은 새뮤엘 베켓에게 영향을 준 것 같으며, 베켓은 잭을 작가로, 화가로 주목했다. 본 논문은 잭의 예술에 대해 평한 베켓의 글 두 편을 다루며, 또한 잭의 문학과 예술의 특징을 논의하며, 잭과 베켓의 희곡 두 편을 비교, 분석한다. 베켓의 희곡은 잭의 영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