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카터행정부는 12·12군사쿠데타 발생에 대하여 적극적 개입의 미 국내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국 군부 내 국수적 민족주의적 저항과 한국민 의 제2의 이란화 가능성을 염려하여 ‘불개입 자세’를 취했다. 미국은 이 쿠데타에 조성된 사태의 역전을 강하게 시도할 만큼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한국의 내부적 군권쟁탈 문제가 그들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현상유지에 만족하여 신군부세력을 군의 실권세력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적으로 인정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군부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어 정권 수행능력 을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친미적 정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 던 것이다. 또한 미국은 동북아에서 자신들의 핵심이익인 안보·경제적 이 익을 수호해 줄 수 있는 측면을 감안했을 때 불개입적 ‘관망(wait and see)’정책을 추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이러한 불관여정책, 즉 ‘신중한 불개입’ ‘관망’정책은 신군부 병력이 특별한 저항 없이 쿠데타 상황을 종료하고 궁극적으로 성공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신군부에 대한 뚜렷한 세력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관망 정책은 결국 강자를 선택하는 결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최소비용에 의한 최대효과’를 지향했으며 또한 ‘대세편승적 승자 승 논리’에 바탕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안보·안정’ 적인 기존 정책노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1954년까지 한국은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거의 10년간 국토의 지도 제작에 대한독자적인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사용된 지도는 미군 지도가 유일하다. 현재 텍사스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1946년, 1951년에발간된 미육군지도창 제작 서울 지도가 온라인으로 공개되어 있다. 이에 반해 UTM 좌표계로 재편집된 1951년의 미군정 지도는 한국에서 희소한 자료로 판단된다. 이들 미군정 지도는 군사작전과 지형 및 도시경관 변화 연구에 매우 유익한 당시의 정보를 제공한다.이 연구의 목적은 1946년 초판 발행되고 1950년 재편집되었으며, 1951년에 발간된 미육군지도창에서 UTM 좌표계로 제작한 서울 중심부의 지도를 서지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먼저, 미군정 지도의 발달과정을 고찰한다. 그 다음으로, 온라인 공개된 미군 지도와 UTM 좌표계로 재편집된 미군정 지도의 서지학적 특성을 비교한다. 특히, 좌표체계, 축척, 방위, 투영법, 지명, 행정구역, 범례, 출처,용도 등 지도의 기본 구성 요소별 특징을 고찰하고 색필로 수기된 내용의 지리적 의미를 고찰한다. 본 지도는 서울의 토지이용과경관의 변화를 연구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This study is about the cultural policy related to fine art under the U. 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from September 8, 1945, to August 15, 1948. Drawing on the previous studies of Korean art history in the ‘Liberation Period’, this study especially concentrates on intention, attitude and activities of the USAMGIK. Particularly the historical documents, stored at the National Archives at the College Park, Maryland, U.S.A., were valuable to do research on the cultural policy of USAMGIK. The cultural policy was subordinated to the political objectives of occupation that can be summarized to building a stronghold of anti-communism in South Korea.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trol, cultural matters were assigned to the Cultural Section, the Bureau of Education, which later turns into the Bureau of Culutre, the Department of Education. The Bureau of Culture dealt with matters of the ancient Korean art treasures and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USAMGIK reopened the Korean National Museum which had been closed by the Japanese since the World War Ⅱ period. After that, U.S. Department of State sent arts & monuments specialists to South Korea for investigating ancient Korean art and culture. Although some of the destructed art treasures were restored during the occupation, there were many negative cases including intentional destruction of historic sites or loot of art treasures by U.S. army. In contrast to their interest in the Korean antiquities, USAMGIK payed little attention to promoting the Korean contemporary artists and their arts. USAMGIK distrusted and suppressed the artists of leftism, while they kept good relations with the pro-American artists and the right-wing artists. In conclusion, the visual-cultural policy of USAMGK was mainly planned and carried out in order to preserve the national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his period produced long-term effects on the fine art and visual culture of South Korea, in terms of institution, policy, and reorganization of art community based on anti-cummu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