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묘는 중국 전통 회화에서 단색 묵선으로 꽃을 묘사하는 기 법으로 선이 간결하고 간결하며 이미지가 생동감 있는 것이 특 징이다.화훼 스케치의 선화는 독자적인 미학을 나타낸다.그것은 제재에서 화조화의 범주에 속하며 이 범주의 기초이기도 하다. 시기에 따라 화훼 스케치의 선화는 서로 다른 형식적 특징과 정신적 의미를 나타낸다.예술가들은 화훼 스케치 선도의 내용 과 형식의 통일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탐구한다.현재 세계 문 화 구조의 배경에서 중국과 서양 문화의 교류와 융합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문화일군들은 세계문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갖고있고 민족문화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있다. 그들은 반드시 우수한 전통문화에 대해 신심을 가지게 될것이며 또 그것을 부 흥시킬 책임도 있게 될것이다. 어떻게 전통적인 화훼 스케치 선도의 도식을 현대 표현과 심 미적 정취에 융합시켜 오늘날 사람들의 정신적 수요를 만족시 킬 수 있는지 우리가 연구하고 탐색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시각 대상이었던 대지와 하늘, 바닷가와 강가의 산과 모래밭, 그리고 숲속의 오솔길, 그 길가에 여기저기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 개울에 흐르는 잔잔한 물소리, 가끔은 크고 작은 자갈에 부딪히는 소리들은 우리에게 맑은 숨을 쉬게 하고 작은 힘을 솟게 해주었다.
겨울 산과 여름 산의 정서가 다름은 우리가 자주 느끼는 일이다. 바다에 있는 산은 작게 보이고 강가에 있는 산은 크게 보인다. 사람이 서서 볼 수 있는 거리 때문이겠지만 우리에게 주는 정서 역시 제각기 다르 다. 특히 여름철 해질 무렵 연한 보랏빛 석양에서부터 검 짙은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지켜본다는 것도 자연의 일부분을 충분히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 싸여 있어 그런 기억들이 2차원의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2차원 공간? 우리는 3차원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2차원 공간이 생소하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2차원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책, 사진, 문서, 벽면 등등.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3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생홣 밖의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 공상, 환상, 망상, 그리고 창의적 발상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자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글자로 쓰는 것, 선으로 그리는 것, 색으로 칠하는 것 등등. 최초의 원시인도 기계문명시대에 사는 현대인도 하기 힘든,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놓은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볼 수도 있다. 암각화, 벽화, 골각화 등등.
캄캄한 동굴 안에, 거대한 암석에 그러한 그림들을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슨 도구를 사용했으며 누구를 향한 절규였을까. 필경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을 했다면, 생각할수록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이가 많아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왜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이러한 역사적이거나 철학적인 얘기를 꺼내면 밥 맛 없는 소리 한다고 치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우리 역사를 잘 모르고, 인류의 역사를 잘 몰라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철학에 물리적 실체가 있다면 아마 예술이라는 걸로 표현될 것이다. 어떤 모습, 무슨 색깔, 무슨 구상이 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오롯이 작가 자신일 것이다. 관람객이 작품을 그저 쓱 쳐다본다면 그 작품은 같은 위치와 같은 장면만 보여준다. 관람객의 사회적 위치나 시선과는 상관없이 민 낮의 정서로 그 사람 과 마주친다. 그러면 관람객은 그림 속의 사심을 자기의 마음으로 하나씩 벗겨낸 다음 맨 마지막으로 보 통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게 뭐야? 나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작품 앞을 떠난다.
동일한 시간에 올실 안의 풍경과 문 밖 강가의 풍경이 다를지라도 생명의 리듬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물풀에 잠시 앉아 있는 까만 잠자리나 빨간 고추잠자리가 하는 일은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상에 모든 생명은 ‘질서’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스턴미술관의 한국미술 컬렉션은 보스턴미술관의 운영 및 소장품 수집과 관련된 컬렉 터들과 큐레이터에 의해 변화를 겪어왔다. 보스턴미술관의 동양미술품 소장 및 연구는 일본 과 중국이란 큰 축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그 중 한국미술은 부수적인 부분으로 다뤄졌다. 본 논문은 동양컬렉션의 조성 과정 및 소장과 연구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두 명의 큐레이터와 컬렉터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보스턴미술관의 한국미술 컬렉션의 형성과 특징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보스턴미술관에 한국 미술품이 처음 소장된 1892년에서 1910년 사이 에드워드 실베스터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1838~1925)의 한국 도자 컬렉션이 가장 주요하다. 일본 도자기와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표본으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한국 도자기가 수집되었으며 특히 신라, 가야의 토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시기, 종류의 구분 없이 하나의 캐비넷에 전시된 한국도자기는 민족학, 인류학과 유사한 맥락에서 연구되었다.
이어지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기존 동양미술 컬렉션에 부족한 일본 조각과 중국 미술품들을 보강하는 과정에서 회화, 공예 등 다양한 매체의 한국미술품이 함께 소장되었다. 그 중 특별 기금을 통해 수집된 고려청자는기형, 색감, 문양, 유약 등의 특징을 파악하는 등 청자 자체로서 전시, 연구되는 양상을 띠었다. 연구를 통해 과거부터 중국, 일본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우수함과 고분 출토 도자기가 갖는 진품성이 고려청자를 한국미술의 대표격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한편 고려청자는 중국 고대 역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동양미술의 보고로 발전한 일본미술까지의 시대적 변화를 담은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전시에 한 부분으로 자리하였다. 전시구성과 함께 보스턴미술관의 동양미술 소장, 연구에 반영된 오카쿠라 카쿠 조(岡倉天心, 1868~1913)의 영향은 동양미술 연구자와 컬렉터들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도미타 코지로(富田幸次郎, 1890~1976)가 동양미술부를 이끌어 나가던 1930년 이후, 일본 미술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이 주로 소장, 연구되었다. 동서양을 오가며 주요 컬렉터 및 기관과의 관계를 형성해 온 야마나카 회사(Yamanaka Company)를 통해 수집된 금속공예품은 코지로에 의해 일본 연구자들의 발굴,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연구되며 한반도 내 일본 식민정책의 성과를 함께 담아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국미술 컬렉션에 가장 큰 기여한 찰스 베인 호이트(Charles Bain Hoyt, 1889~1949)의 한국 컬렉션은 고려청자, 금속공예에 편중되어 전체 한국미술 컬렉션과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조선시대 도자기가 청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수집되었으며 다양한 기형, 기법을 반 영하고 있어 개인의 취향도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As the great catastrophe i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 the Cultural Revolution(CR) is an object, which must have sutured the past of darkness. At the same time it is a continuous event and also a scar of memory. In other words, for history is “a dialog between the past and the reality”(E.H.Kar), CR intervenes in the reality and, on the contrary, the reality recomposes CR. From this point of view, CR is a historical event, which so far is not ended, and it is an object of memory, which is still being composed at the moment.As the saying: “Poetry is greater than history”(Aristoteles), artistic works more intensively refect the past. The works related to CR can not be an exception. And CR is endlessly exposed in the contemporary Chinese fne arts and the works of the contemporary Chinese artists—Wang Guangyi, Yue Minjun, Zhang Xiaogang and others are proved to be those who suffer from the trauma of CR and who feel no liberty from CR. For example, CR probably is a symbol showing the “identity” of the Chinese artists. And the diversity of the symbol is the experience and pattern of the dialog between artistic works and CR (i.e., intervention in reality). For example, with withering of grand-narrative and appearance of micro-narrative, the CR critical works of Guan Zhoudao were the root of the Chinese fne arts in the late 70s and early 80s. In the contemporary cultural situation, the literary works about CR actively analyzed the history (CR) from the personal point of views and explained in the way of monolog and micro-method led the 1990s’ works. In this way they tried to recompose the history “randomly”, like looking at reality with their own eyes. In this process, CR is continuously exposing new features and the real facts are appearing before us as unfamiliar phenomena. This is a way of combination and “reappearance” of contemporary arts and reality. In conclusion,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make it possible to see a section of the contemporary Chinese fne arts through the study of the icon image of CR and to analyze the way of fne arts recomposing the history and the intervening in the reality. In this sense, the author has entitled the article “Icon and Form”. It means how to reshape (the present) the typically formed icon of the CR (the past).
미술(Art)은 아동의 정서발달(Emotional advancement)에 영향을 준다. 아동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조절할 줄 알아야 상대방의 사고, 감정, 의도 등 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기초적 수준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아동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조절하는 능력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반복되는 정서의 학습이 각인되어 비슷한 상황에서 학습한 것처럼 반응되는데 미술치료를 통하여 분노를 잘 다루는 법을 배우거나 감정이입의 표현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평생 동안 지속 될 것이다. 정서란 태어나면서 부터 행동에 작용할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성격의 전반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영유아기 때부터 개발된 정서를 잘 유지하고 가족 간의 바람직한 양육과 보호로 정서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정서장애 아동은 부모의 통제와 억압으로 불안정한 정서를 갖게 되므로 미술치료(art therapy)활동에서 자신의 욕구표현과 매체(Media)의 충족 경험으로 내면에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고 보상(compensation)하도록 도와 스트레스(stress)의 경감을 제공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동의 정서함양을 위한 미술치료는 언어발달상 표현의 한계가 있거나 언어적 상호작용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동에게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본 연구에서 아동은 미술활동을 통하여 우울(depression), 분노(anger), 반항(defiance), 공격성(aggression)등을 표출하며 부정적 감정배설(excretions)과 정화(catharsis),그리고 HTP그림 진단기법을 적용한 질적사례 연구를 제시하고자 한다.
Based on my teaching experience in the Art colleges, I found potential usages of a game engine as a tool for fine art. This paper will provide new way to use game engine; Making a Virtual Art Gallery with a real-time 3D rendering game engine and Making a Draft movie for a 3D Animation in postproduction using a real-time 3D rendering game engine. This paper will also provide the case study of various projects draft movie for a 3D animation with Real-time 3D Rendering Game Engine. This study will provide new possibility of game engine.
From the late 1920s to the 1930s, Korea’s fine art community focused on traditionalviewpoints as their main topic. The traditional viewpoints were discussed mainly byKorean students studying in Japan, especially oil painters. Such discussions on tradition canbe divided into two separate halves, namely the pre- and post-Sino-Japanese War (1937)periods. Before the war, the modernists among Korea’s fine art community tried to gain afuller understanding of contemporary Western modern art, namely, expressionism,futurism, surrealism, and so forth, on the basis of Orientalism, and borrow from theseschools’in order to create their own works. Furthermore, proponents of Joseon’s avant-garde fine arts and artists of the pro-fine art school triggered debate on the traditionalviewpoints.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se artists continued to embrace Westernmodern art on the basis of Orientalism. However, since Western modern fine art wasregressing into Oriental fine art during this period, Korean artists did not need to researchWestern modern fine art, but sought to study Joseon’s classics and create Joseon’s ownavant-garde fine art in a movement led by the Munjang group. This research reviews thetraditional view espoused by the Munjang group, which represented the avant-garde fineart movement of the post-war period. Advocating Joseon’s own current of avant-garde fine art through the Munjang literarymagazine, Gil Jin-seop, Kim Yong-jun and others accepted the Japanese fine artcommunity’s methodology for the restoration of classicism, but refused Orientalism as anideology, and attempted to renew their perception of Joseon tradition. The advocation ofthe restoration of classicism by Gil Jin-seop and Kim Yong-jun appears to be similar to thatof the Yasuda Yojuro-style restoration of classicism. However, Gil Jin-seop and Kim Yong-jun did not seek their sources of classicism from the Three-Kingdoms and Unified Sillaperiods, which Japan had promoted as a symbol of unity among the Joseon people;instead they sought classicism from the Joseon fine art which the Japanese had criticized asa hotbed of decadence. It was the Joseon period that the Munjang group chose as classicism when Japanwas upholding Fascism as a contemporary extremism, and when Hangeul (Korean writing system) was banned from schools. The group highly evaluated literature written in the styleof women, especially women’s writings on the royal court, as represented by Hanjungnok(A Story of Sorrowful Days). In the area of fine art, the group renewed the evaluation of notonly literary paintings, but also of the authentic landscape paintings refused by, and thevalues of the Chusa school criticized as decadent by, the colonial bureaucratic artists,thereby making great progress in promoting the traditional viewpoint. Kim Yong-junembraced a painting philosophy based on the painting techniques of Sasaeng (sketching),because he paid keen attention to the tradition of literary paintings, authentic landscapepaintings and genre paintings. The literary painting theory of the 20th century, which washighly developed, could naturally shed both the colonial historical viewpoint whichregarded Joseon fine art as heteronomical, and the traditional viewpoint which regardedJoseon fine art as decadent. As such, the Munjang group was able to embrace the Joseon period as the source ofclassicism amid the prevalent colonial historical viewpoint, presumably as it hadaccumulated first-hand experience in appreciating curios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works, instead of taking a logical approach. Kim Yong-jun, in his fine art theory, definedartistic forms as the expression of mind, and noted that such an artistic mind could beattained by the appreciation of nature and life. This is because, for the Munjang group, theexperience of appreciating nature and life begins with the appreciation of curios of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Furthermore, for the members of the Munjang group, who were purists who valuedartistic style, the concept of individuality presumably was an engine that protected themfrom falling into the then totalitarian world view represented by the Nishita philosophy. Such a 20th century literary painting theory espoused by the Munjang groupconcurred with the contemporary traditional viewpoint spearheaded by Oh Se-chang in the1910s. This theory had a great influence on South and North Korea’s fine art theories andcircles through the Fine Art College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Pyongyang Fine ArtSchool in the wake of Korea’s liberation. In this sense, the significance of the theoryshould be re-evaluated.
This study is about the cultural policy related to fine art under the U. 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from September 8, 1945, to August 15, 1948. Drawing on the previous studies of Korean art history in the ‘Liberation Period’, this study especially concentrates on intention, attitude and activities of the USAMGIK. Particularly the historical documents, stored at the National Archives at the College Park, Maryland, U.S.A., were valuable to do research on the cultural policy of USAMGIK. The cultural policy was subordinated to the political objectives of occupation that can be summarized to building a stronghold of anti-communism in South Korea.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trol, cultural matters were assigned to the Cultural Section, the Bureau of Education, which later turns into the Bureau of Culutre, the Department of Education. The Bureau of Culture dealt with matters of the ancient Korean art treasures and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USAMGIK reopened the Korean National Museum which had been closed by the Japanese since the World War Ⅱ period. After that, U.S. Department of State sent arts & monuments specialists to South Korea for investigating ancient Korean art and culture. Although some of the destructed art treasures were restored during the occupation, there were many negative cases including intentional destruction of historic sites or loot of art treasures by U.S. army. In contrast to their interest in the Korean antiquities, USAMGIK payed little attention to promoting the Korean contemporary artists and their arts. USAMGIK distrusted and suppressed the artists of leftism, while they kept good relations with the pro-American artists and the right-wing artists. In conclusion, the visual-cultural policy of USAMGK was mainly planned and carried out in order to preserve the national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his period produced long-term effects on the fine art and visual culture of South Korea, in terms of institution, policy, and reorganization of art community based on anti-cummu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