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개화기 분묘를 둘러싼 소송에 관한 것이다. 우선 분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제의 제정과정을 살펴보았다. 특히 1900년 분묘소송에 관한 법제의 개정을 통해 전통법제에서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던 민·형사 구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95~1905년까지는 ≪大典會通≫의 분묘에 관한 규정들이 재판의 法源으로 적용되었던 것에 반해, 1905~1909년까지는 ≪刑法大全≫의 분묘에 관한 규정들이 재판의 法源으로 적용되었다. 특히 ≪刑法大全≫에서는 그 전시대의 법전과 달리, 양반이 아닌 평민들도 10보의 분묘한계 규정을 두었다. 그래서 개화기에는 양반이 아닌 평민들도 분묘에 관한 소송을 쉽게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聽訟期限 규정을 두어 20년이 지난 분묘소송은 수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묘소송에 관한 재판 실무를 알아보기 위해, 『舊韓末 民事判決集』에 등장하는 200여건의 분묘에 관한 민사판결을 분석하였다. 이 판결들을 통해 분묘에 관한 소송이 발생하였을 때의 민사실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첫째, 분묘 소송은 원토지소유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분묘를 만든 暗葬 혹은 勒葬의 경우에 시작되었다. 둘째, 분묘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당시 재판소의 판사들은 ≪大典會通≫ 및 ≪刑法大全≫의 규정을 충실히 적용하여 판결하였다. 셋째, 20년이 도과하면 더 이상 심리하지 않는다는 聽訟期限 규정은 분묘소송에서도 중요한 논거였다. 넷째, 분묘소송에서는 확정적인 법규범 이외에 앉아서도 서서도 안 보임(坐立具不現) , 情, 理 등 법원리 규범을 재판의 법원으로 원용하기도 하였다. 다섯째, 재판소에서는 당사자 간의 화해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개화기는 전통법제에서 서양의 법제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개화기에는 민법 및 형법 등 단행법이 제정되지는 못하였지만, 민법학 및 형법학 등 법학이 먼저 도입되었다. 이때 법철학(법사상학)도 도입되었는가 하는 점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개화기에 법철학 교과서가 집필되지는 못하였고, 법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의 분야가 성립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法律과 道德의 구분, 自然法과 人定法(實定法) 의 대립, 法律哲學과 成文法學의 차이 등 법 철학적 논의는 활발하였다. 왜냐하면 서양의 법제도와 법철학을 받아들 인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이 西遊見聞, 法學通論, 법 학잡지 등에 서양식 법사상을 受容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민사재판 실무에서 서양 민법학의 法理가 적용된 재판이 행하여 졌다. 그 이유는 민법전이 제정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교통사고·명예훼 손 등의 법적 분쟁이 발생하자 전통법과는 다른 서양의 법리를 적용해 재판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화기는 한국법철학사에 서 서양법철학 혹은 법사상학이 처음으로 도입된 때라고 할 것이다.
본 연구는 1907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및 평리원(平理院)의 민사판결에 대한 것이다. 위 판결들을 통해 역사학적 의의와 법학적인 의의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역사학적인 의의는 다음이다. 첫째, 친일 계몽주의적인 일진회의 토지늑탈에 대한 폐해이다. 둘째, 개화기 당시의 화폐의 종류 및 물가의 변동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법학적으로는 절차법적인 의의와 실체법적인 의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절차법적인 의의는 다음이다. 첫째, 판결문의 형식이 정형화 되었다. 둘째, 피고의 주소지를 관할로 재판소가 정하여졌다. 셋째, 결석재판은『廷吏規則』제6조에 의해 행하여졌다. 넷째, 소송대리인으로 대언인이 존재하였다. 다섯째, 소송비용은 패소자가 부담하였다. 그리고 실체법적인 의의는 다음이다. 첫째, 1907년의 부동산 이중매매(二重賣買)의 법적처리는 조선시대와 거의 유사하였으며, 제1매수인을 보호하였다. 둘째, 전당제도(典當制度)가 담보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민사중개계약으로 거간(居間)인의 책임을 알 수 있다. 넷째, 개화기 당시 이자제한에 대한 법리를 알 수 있다.
개화기의 민사재판은 그 이전과 달리 행정과 사법의 분리, 민사와 형사의 분리, 사법기관인 재판소의 등장 등이 그 특색이다. 민사 재판제도의 실제 운용은 재판소구성법의 등장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실제 운용면에서 형식적인 면과 실질적인 면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형식적으로 원심재판소 및 상급심 재판소의 실제 운용, 문서주의, 관할제도의 정비, 궐석재판의 등장, 법원의 인적 물적 구성의 전문화가 특징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기판력의 확보와 강제집행력의 확보가 이루어졌다. 민사판결문을 통해 법사회사적, 생활사적 특징 및 민사재판에 필요한 법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개화기 당시의 민사재판의 준거법은 大明律》 및 《大典會通》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의 민사재판은 전근대시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로 전통법제와 현대의 법제의 ‘징검다리’역할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