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한문 독해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생에게 한문구조를 교수 할 경우의 한 가지 학습방법으로서 전통시대의 초학교재를 활용하여 2자, 3자, 4자, 5자, 7자의 한문문장을 축자식으로 해독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특히 문장구조의 필수성분인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의 학습에 중점을 두고, 부속성분인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는 문장의 확장정도로 제시하면서 문장의 기본구조를 학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전통 초학교재란 단순히 과거에 사용된 교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이란 과거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창조하기 위하여 재서술 되는 것이다. 현재의 곤란에 위기의식을 느낄 때, 인간은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 반사경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현재의 한문학습에서 느끼는 곤란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과거에 사용하였던 교재들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이런 위기의식과 위기 극복의 노력이 겹겹이 쌓여 갈 때, 한문학습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될 것이다. 이 경우 한문학습의 역사는 결국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전통’에 근거하여 미래를 창조해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문학습의 전통 안에서 사용되었던 초학교재는 교육의 근원적 자료로, 그 내용과 형식은 오늘날에 가져와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한문학습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서, ‘전통교재’의 재해석, ‘전통교재’의 재평가, 혹은 ‘전통교재’의 한계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한자문화권의 한자문화란 한문을 공용문어로 사용하여 영위된 종합적 지식체제 이다. 즉 한문을 지적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사람들의 生活知, 學問知, 普遍知, 構想知등이 모여 이루어진 知識地形圖이다. 한자문화의 ‘知的傳統’은 가치의 역사적 축적이다. 특히 한국의 지적전통은 한 국의 지반에서 현실적으로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한자기록으로 이루어진 지 적전통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것을 교육하고 학습하는 분야가 한문과목 이다. 우리의 한문문화를 동아시아 한문문화 속에서 비교하여 그 同異와 變化, 나아 가 普遍化를 분석할 때 우리만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본고는 한자문화 중 전 통교육과 관련된 지식형성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 때 지식형성에 어떤 교재가 어떤 교육방법으로 사용되었는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전통’ 한문 교육에서 그 지식의 분류와 지식의 실천내용을 고찰하여 지식형성의 틀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전통적 몽학 한문교재는 天地人분류체계를 기반으로 지식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자연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서 사회의 질서체제와 예교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분류체계는 고대사회의 식자교재 인 『급취장』을 비롯하여, 가장 널리 사용된『천자문』등의 중국교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유합』이나『訓蒙字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분류체계 안에 서 초학자들은 識字와 함께 자연스럽게 전통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접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한편 교화용 교재는 자연에 관한 이해에 앞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양하게 제 시하고 있다. 중국 宋代에 만들어진 『소학』,『삼자경』의 분류체계가 율곡의 『성학집요』나『격몽요결』등의 계몽서에 수용되어 계승되었다. 이러한 교화용 교재의 분류체계는 학습자로 하여금 심신의 수양과 독서를 통한 자기계발의 학습방법과 사회 속에서의 처신을 체득하게 한다. 이러한 전통적 몽학교재에 보이는 분류체계를 현대 한문교육 교재에 활용하게 되면,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전통의 이해와 계승의 한 방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李二曲(1627~1705)의 이름은 顒, 또는 容이라고 하고, 字는 中孚이지만, 보통 二曲先生이라고 불려졌다. 陝西省出身으로 평생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 다.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러 번 仕宦을 推薦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평 생 빈한함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明代(1368∼1644)가 끝나고 滿洲族에 의해 淸朝가 세워지는 역사상황 속에서 학문을 하였던 二曲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특색은 宋代朱子나 明代의 王陽明 중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자세로 자신만의 새로운 學術을 이루었다. 이 러한 二曲의 학문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 바로 ‘悔過自新’과 ‘明體適用’이다. ‘悔過自新’이란 말 그대로 학문을 하면서 자신의 過誤를 깨닫고 스스로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이고, ‘明體適用’이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本體를 잘 보전하여 현실에 적용하여 경세치용을 이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二曲이 志向하였던 學問은 理論적 糾明에 滿足하지 않고, 끊임없는 實踐을 摸索하였던 儒學이다. 이런 그의 實踐重視思想이 그의 학문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實踐에 어긋나는 경우는 果敢하게 학문이 아니라고 비평하였다. 즉 內容도 없이 章句에만 얽매이는 學問을 俗學이라고 보았던 二曲이었기 때문에 學問은 悔過自新하여 明體를 밝히고 適用하는 實踐의 學問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