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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6

        1.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과 한라산의 명산문화를 이루는 요소를, 산천제, 명산·진산, 삼신산, 여신설화, 풍수문화와 백두산래맥설의 주제를 들어 역사지리적으로 비교하여 특색과 정체성을 도출한 것이다.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남악으로서 국가적 제의 대상이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반면에 한라산 제의는 17세기 후반에 본격화되고 18세기 초에나 祀典에 등재되어, 지리산에 비해 시기도 늦었을 뿐더러 格도 고을 제의로서 낮았다. 지리산은 조선초·중기에 도(전라·경상)의 명산이자 고을(구례)의 진산으로 지정된 바 있었다. 상대적으로 한라산은 줄곧 고을의 명산이자 진산이었다. 한라산은 제주목의 진산에서부터 주변 고을의 진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지리산과 한라산은 공히 동국의 명산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와서 한라산이 나라의 명산으로 격상된 것은 국가·사회적으로 고양된 영토·영역 의식, 중앙정부의 통치지배력 강화, 그리고 삼신산으로의 위상 변화 등과 관련이 있다. 삼신산으로서 지리산과 한라산도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났다. 방장산은 조선초기부터 거의 단일하게 지리산으로 지칭되었으나, 영주산은 조선초기에는 변산으로 지칭되다가 17세기 초반 무렵부터 한라산으로 굳어졌다. 한라산이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지면서 명산으로서 위상은 크게 제고되었다. 지리산의 성모천왕과 노구,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은 모성의 상징이미지를 지니지만, 각각 어머니신과 할머니신으로 상징적 의미에 차이가 났다. 이는 지리산과 한라산에 대한 지형경관 및 생활터전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지리산권역에서 풍수의 영향력은 깊고 컸지만, 한라산권역에서는 조선중기까지 미약하였다. 지리산권역의 마을에는 풍수형국론이 문화생태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지만, 한라산권역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지리산과 한라산의 白頭山來脈說은 조선후기적 명산문화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2.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s a representative of Mountain culture, Mount Tai’s description and discussing can be dated from pre-qin dynasty, bloomed in Ming and Qing Dynasties. But its beginning of entering Modern Academic Visual Field started from the Twentieth Century. This dissertation made three analyses on the Retrospect and Prospect of Mount Tai Cultural Studies: The first part, made a brief retrospect of Mount Tai Culture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second part, mainly commented on Mount Tai Culture Research Results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third part, prospected the Mount Tai cultural orientation and topic selections
        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명산은 자연환경의 독특함이나, 혹은 문화 발생지, 무형 문화재의 본거지, 특 색 토산물의 출산지 등으로서 일반적으로 자연 풍경이 수려한 산을 일컫는다. 명산은 국가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을 주거지로 하는 지역민뿐만 아니라, 각 시대 모든 계층의 유람객과의 관계를 통해 특정 지역민에 의해 생성 되는 일반 지역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문화를 ‘명산문화’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각 주요 명산을 중심으로 명산문화 연구소와 기타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 ‘사람과 산’ 에 관한 다양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다. 중국의 명산문화 연구는 국내외 학술 적 연구와 교류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중국명산의 세계적 인지도를 높여 중국 명산의 세계 자연·문화유산 등재에 일조하였으며, 국가 주요 연구과제로 대내외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태산연구소와 오대산연구소는 연구 참여인력의 규모와 연구 성과 면에서 중 국 명산문화의 대표 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두 연구 소가 제기 하였던 ‘태산학’, ‘오대산학’의 명산학 정립에 대한 논의이다. 비록 명 산학 정립에 대한 찬반 의견이 현재까지도 분분하지만, 명산문화 연구를 하나 의 학문으로서 정립하고자 하는 논의는 명산문화 연구발전의 한 단계라고 여겨 진다. 본고는 중국 명산문화 연구의 발전과정과 현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리산권 문화 연구의 명산문화로서의 연구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4.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 명산문화의 정체성을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명산문화의 개념 정의, 사상적 배경 및 구성 요소, 역사적 기원과 형성 유형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중 심으로 유학적 명산문화의 전개와 의의 등을 주요 논제로 고찰하였다. 조선조 유학사상은 한국 명산문화의 인문적 발전을 이끌고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었다. 道學者들에게 있어 명산경관은 天地動靜의 이치를 體現하 고 있는 공부텍스트이자 觀物察己의 유학적 存養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명산 의 장소이미지를 인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名山과 名儒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상하였다. 實學者들에 있어 명산의 산수는 可居地 생활권의 한 입지 요건이 되었고, 명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어 名山誌가 저술되 었다. 白頭大幹과 관련하여 명산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루어졌고 국토의 祖 宗이 되는 명산으로서 백두산이 주목되었다.
        5.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