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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P’yohaerok was written by the order of King Sŏngjong in June 1488. It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drifting records to China in the Ming era, which was published in six different printed versions in the Chosŏn period. There are two sets of versions, each of which is comprised of three. One is in Toyo Bunko, Yomei Bunko, and Kanazawa Bunko, all of which had been printed before Hideyoshi’s Invasion of Chosŏn in 1592. The other printed and published as a part of Kŭmnamjip after the Invasion has been available in South Korea. P’yohaerok is really an excellent work. For not only does it possess an important historical value of the Ming Dynasty but also allows us to discover a variety of linguistic data and phenomena such as nonstandard forms of characters, vocabulary, grammar and phonemes of native languages in the Ming era, etc. From the perspective of linguistic discourse, the author makes a detailed analysis of the Modern Chinese Linguistics of the work.
        5,800원
        2.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중국 명청시대 동아시아의 해역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교류활동이 활발했다. 그 가운데 중국과 조선, 일본, 유구(琉球) 등 나라들의 공식적인 교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폭풍을 맞은 동아시아 표류민들도 볼 수 있었다. 현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정기적인 관주도의 교류들이 빈번하게 진행되었으며, 이 사신(史臣)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통하여 자주 왕래한 덕분에 해양인식과 해상위기 대책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해상의 민간인들의 활동은 돌발적 사태로 표류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백성들이 갖는 해양관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은 서로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교류는 안전하면서 편리한 길을 이용하였으며, 민간인들 또한 해상교류를 하였다. 최부(崔溥)와 최두천(崔斗燦) 두 사람은 조선사대부로서 폭풍을 만나 중국 절강으로 들어 갔다. 비슷한 경로로 제주도를 출발하여 영파(寧波) 연안에 상륙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들의 해상활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과 중국 명청 간의 특색 있는 해상활동이나 해양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崔溥의 .漂海錄.과 崔斗燦의 .乘.錄.에 나타나는 두 저자의 산동 인식을 각각의 시대 별로 살펴보았다. 중국 당나라와 원나라는 국제화 정책을 시행하여 많은 유학생을 수 용했다, 그러나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유학생 수 용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가 줄었고, 대체로 책을 통해서 중국을 체험하게 되었다. 명.청 시기,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사신들은 중국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나, 사신의 신분으로는 북경 이남 지역의 경험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북경 이외의 지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비공식적인 漂流人 의 경우 북경 이남 지역을 경험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崔溥와 崔斗燦의 저작이 가장 대표적이다. 崔溥와 崔斗燦은 표류인의 자격으로 북경 이외의 지역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이 담겨 있는 .漂海錄.과 .乘.錄.은 연구 자료로서 중요성을 띤다. 성종 연간에 관인 崔溥 일행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조 연간, 장인인 제주 대정현감 金仁澤의 요청으로 제주도로 떠난 崔斗燦은 1년 후 귀향길에서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 게 되었다. 성종 17년(1486) 중국에 표류한 崔溥를 이어, 崔斗燦은 300여년 후인 순조 18년(1818) 중국에 표류했다. 두 시기 모두 조선 왕조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중국은 왕조가 바뀐 완전히 다른 시대였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다른 시대 배경 아래서 겪는 체험과 감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두 시대의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의 차이 등 다양 한 면에서 동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崔溥는 조선 시대의 관인 으로서 어명을 받아 .漂海錄.을 작성한 것에 반해, 崔斗燦은 자신의 취미대로 .乘.錄.을 기록했다. 이러한 점 역시 두 텍스트의 차이를 야기했다. 崔溥는 매우 상세하고도 다양한 범위의 내용을 기록했으나, 집필의 의무가 없었던 崔斗燦의 텍스트에는 감정의 표출의 기록과 詩歌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4.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의 선원 조직과 항해술과 관련해서는 조운선의 선원 조직과 선단 편성 등만이 알려져 왔고, 일반 선박의 선원 조직이나 항해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조선 성종대 바다에서 표류한 경험담을 기록한 최부의 「표해록」은 그동안 국문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된 바 있지만, 정작 바다에서 조선의 선원들이 어떻게 항해하여 안전하게 중국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었다. 이 소고에서는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 조직과 항해술에 대해서 상세히 도출해 내고, 조선 영조대의 장한철의 「표해록」과 비교함으로써 두 선박이 상이한 표류 결과를 내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