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영규사실기」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사와 의병활동 을 확인해보고, 왜 그런 기록이 등장했는지, 불교와 유교측 간에 영규에 대한 시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규사실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는 시점에서 영규가 전란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의병장들의 전투 기록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영규사실기」에서는 영규가 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나무를 쪼개 무예훈련을 했다던가, 단단한 나무를 발견하면 따로 숨겨두었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의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헌과 고경명 등 호남지역의 의병장을 하게 되는 이들이 갑사로 찾아오는 장면은 이른 시기에 의병모집을 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영규사실기」에서처럼 사실(史實)이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영규를 미화하거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 등은 유교 지식인들이 쓴 영규 관련 자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불교 측이 영규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유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영규의 의병활동에 따른 계율논쟁을 변증하고, 그의 충절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영규의 의병부대가 전란 초기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조선정부의 위기상황을 전환시키는데 기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에 「영규사실기」와 같은 문헌이 등장하고, 계룡산에 사우를 세우는 등 영규에 대한 추숭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러한 불교와 유교 간의 누적된 시각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불교 승려로서가 아니라, 왕조를 위해 절명한 의병장으로서의 영규를 추숭하려 했던 그들의 의지가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에는 당파적 성향이 강하다. 전란이 일어나기 9년 전 (1583)에 栗谷 李珥가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 1590-91년 通信使 일행의 보고 가 正使, 副使 간에 서로 달랐던 것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두 가지는 이 시 대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데도 객관적 분석, 판단보다도 분쟁 적 측면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心性 도야를 중시하는 性理學者들이었다. 따라서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리고, 강한 是非之心 을 가졌다. 조정에 나아와서는 聖聰, 곧 군주의 옳은 판단을 이끄는 데 기여하 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정사를 논할 때 자신의 견해를 엄정하게 표현하는 한편, 동료의 진언에 잘못이 보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논척하였다. 그러나 상대 의 논변이 설득력이 있거나 실제의 사세에서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을 발견 하면 이를 인정하기를 미덕으로 삼았다. 10만 양병설이나 통신사 보고 건에 관 한 오늘날의 대척적 인식은 사실은 당대 관련자들 사이의 인식보다도 더 과장 된 면이 없지 않다. 이 글은 당대의 관련 기록에 근거하여 후대의 부정적 윤색을 걷어내어 바른 지식과 인식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栗谷 李珥의 10 만 양병제안, 鶴峰 金誠一의 의병 招諭의 역할, 西厓 柳成龍의 관군 재건의 공 로를 주요 논제로 한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진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盧應奎라는 인물에 대 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노응규는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노응규의 조상 은 가세가 몰락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의 부친인 盧以善이 安義로 거주지를 옮겼던 것도 생계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런 경제적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응규는 학문에 전념하여 崔益鉉, 宋秉璿 등 당시 위정척 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유명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많은 노론계 인 물과 교유하게 된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노응규는 1896년 1월 초에 진주 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와 인근 고을의 여러 세력들의 호응에 따라 한때 노 응규는 鄭漢鎔과 함께 경남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 은 의령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물리치고 부산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 러나 3월 초 진주성은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다가 1897년 10월 초 왕으로 부터 그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러 관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부형 살 해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 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1월 중순에 그는 충청도 黃澗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이 일은 무산되었 고,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였다. 노응규의 의병활동은 19세기 말 당시 지방 유림 사이에 퍼져 있던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 에 옮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당시 노론계의 사상과 노응규 집안 의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학문 수행과정에서의 집안의 경 제적 어려움이 그의 사상과 현실대응에 더 치열한 면모를 보이게 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