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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정읍 고사부리성은 백제 5방성 중 중방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동안 9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와 문헌기록 등을 통해 중방성으로서의 역할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2021년 조사가 이루어진 9차 발굴조사에서 새로운 남문지가 확인됨에 따라 기 존에 알려진 남문지와의 관계 및 성격에 대해 재고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본고에서는 기존 남문지에서 불과 90미터 떨어져 위치한 새로운 남문지에 대해 문지의 입지, 형태, 구조 등을 기존에 확인된 고사부리성 문지 및 백제 산성 문지와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문 헌기록과 발굴조사 결과를 비교하여 고사부리성 문지 운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기존에 확인된 남문지는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에 사용된 흔적만이 확인될 뿐, 초축 당 시의 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에 새롭게 확인된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초축 외성벽과 동일한 방법(삭토법, 들여쌓기, 치석한 석재 사용)으로 축조된 문지 측벽이 확인되었으며, 입지양상 및 형태 역시도 백제 산성 문지에서 보여지는 것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이렇듯 새로운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초축 당시부터 운용되어 오다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2차례 개축된 것으로 판단되며, 고려시대까지 사용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문지폐쇄와 함께 성벽으로 개축되었다. 이후 폐쇄된 남문지는 서쪽으로 약 90m 가량 이동하여 기존에 알려진 남문지를 개축하여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확인된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4개의 성문 중 성 내부로의 진입이 가장 용이하고, 성 내의 주요시설과도 멀지 않음에 따라 고사부리성의 초축 당시의 정문 역할을 했던 것으 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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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읍성은 조선시대 500여 년간 각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다수가 해체․철거되었다. 이미 많은 읍성이 사라졌지만,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토성으로 처음 축조되어 조선시대 연산군 6년(1500)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던 언양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남천(현재의 태화강)의 제방 축조를 위하여 동남쪽 일부 성벽이 훼철된 것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비교적 양호한 보존상태를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언양읍성의 남문지는 2002년 도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수행되었고, 근현대기의 건물 아래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잔존하고 있던 남문지의 전체적인 구조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원형 복원의 가능성이 그 어느 부분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상징성이나 파급효과, 역사․교육적 활용도 및 도시경관 개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재고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문에 대한 건축적인 측면에서의 고증작업이나 복원적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본 연구는 언양읍성의 정문이었던 남문(영화루)에 대한 복원적 연구를 진행하여 지금까지 연구가 미진하였던 언양읍성의 문루건축의 건축적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복원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 결과 조선시대 조영되었던 언양읍성 남문 일곽은 전면에 반원형의 옹성을 두른 개거식의 성문이었으며, 그 문루인 영화루는 중층(2층) 5량가구에 초익공을 둔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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