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개성은 경험의 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예술가의 입장에서 행하는 실천 이다. 그러한 진실한 경험은 현실과 아름다움을 모두 포함한다. ‘실재적’인 능력 안에 서 우리는 몰개성의 경험이 충만함과 전체성을 가져온다면 몰개성의 미적 상태가 더 큰 이해를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 S. 엘리엇, W. B. 예이츠와 존 키츠는 인 간 삶의 모든 의미를 ‘결집’하여 예술로 만듦으로써 ‘감수성의 메커니즘’을 고안하여 예술을 창조했다. 이 위대한 시인들에게 몰개성화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현상과 현실이 구별되는 방식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엘리엇은 일상의 경험을 단편, 무정부 상태 및 불규칙성과 동일시하지만 예이츠는 일상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경험을 대립적 으로 본다. 한편 키츠는 탐닉이 최대 상태의 일상의 사건들과 상황들로 일상을 위치시 킨다. 전체성의 출현이 연기되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리엇, 예이츠, 키츠 는 경험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인 ‘몰개성,’ ‘존재의 통일,’ ‘부정적 능 력’을 제시한다.
많은 모더니스트들처럼 엘리엇 역시 과학에 대해 이중성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그가 이미지즘을 시에 적용할 때 그는 과학적 리얼리즘 특히 원자론적 리얼리즘을 동반하는 편이다. 그리고 과학적 객관성이 감정주의를 거부하는 편이기 때문에 엘리엇은 종종 과학적 객관성이 끊임없는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신의 몰개성이론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여긴다. 더구나 그의 시에서 시어를 가다듬거나 리얼리스틱한 장면을 구축 하려고 할 때 즉 원자적 사실들이 원자적 문장들과 상응하도록 하는 작업을 할 때 엘리엇은 과학의 분석적 방법을 채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학의 만용 즉 사회 과학이나 인문학 등과 같은 다른 분야에 그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엘리엇은 과학이 자기 분야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편적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장 깊은 진리를 획득하는 데는 불충분하다고 믿는다. 더구나 과학적 객관성은 부분적으로 중립성을 얻을 수 있지만 자칫 과학이 조건적인 조직화나 압박적인 체계화에 경도된다면 행동주의처럼 현실을 경직시킬 수도 있다. 반면에 예술적 강렬함이나 예술적인 도취는 혼란한 관계에서 완전한 이탈을 이룰 수 있고 메마른 현실들을 재생시킬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진화론에 의존하는 베르그송적인 생기론을 엘리엇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기론 역시 순수 운동이 무모한 행동주의로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이론과 실제, 즉 비평과 시 사이에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사실 엘리엇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히 개별 작가에 대한 비평적 관점이 변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엘리엇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였으며, 이러한 비난에 대한 대안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시 적 기법이다. 엘리엇은 초기부터 시작 행위자의 비평을 줄곧 옹호해왔 듯이 창작행위는 비평에 우선한다고 하였다. 즉 그의 이론을 정당화하 는 것은 바로 시라는 덕이다. 그러나 엘리엇에게서 이론과 실제는 일방 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으로 그의 시 이론과 시 창작행위 사이의 긴밀성을 추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엘리엇의 몰개성시학을 정당화 하 는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 기법은 엘리엇의 이론과 실제, 형식과 내용을 연결해 주는 수단이며, 동시에 시학이론—즉 시는 그 자체로 자 기 충족적이라는 이론—을 시험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인 것이다. 셰익스 피어, 단테, 형이상학파 시인, 상징주의자, 이미지스트 등은 모두 이러한 몰개성 기법의 연구자로서 엘리엇에게는 유의미했다.
소나무 향기와 노래하는 지빠귀 새는 객관적상관물에 근거한 시인의 의식에서 창조된다. 철학자 데리다는 차이의 체계와 연쇄적 운동은 객관적상관물로 대체된다고 믿는다. 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가 유희가 되는 조건으로 존재(Being)에 도달 할 수 있다. 이 사랑을 부르고 또 사랑의 시를 쓰는 가치는 모든 가치를 능가하며 열계단 사다리의 가치에 못지 않다. 시간과 공간보다 절대적 우연의 맹렬한 일격을 철학자는 강조한다. 절대적 우연에 근거한 맹렬한 일격을 통해서 기표보다는 기의에 더욱 큰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부동하는 기표는 극소한 사상의 여유(극소한 유희의 간격)의 결핍 때문이다. 맨나는 이율배 반을 초극할 수 있는 의미론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단순한 형태로 제로의 상징적 가치이며 부재의 음소가 아닌 제로음소이다. 소나무 향기가 기표에 근거한 것과 또 다른 형태의 존재(노래하는 지 빠귀새)는 기의에 근거하고 있다. 소나무 향기와 노래하는 지빠귀 새와의 관계는 사회과학이 아닌 생물학과 심리학을 통한 제로물체와 비종족의 종족과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겠다. 즉 구조들의 구조가 맹렬한 일격으로 언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철학자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