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이라는 용어는 읍치(관아)가 위치한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려시대까지는 사용되지 않다가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행정이나 군사 중심의 치소성 (治所城)이었으나, 고려시대 말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동남해안 중심으로 새롭게 방어용 성 을 쌓으면서 기존의 치소성과 구별하기 위해 읍성(邑城)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경주읍성에 대한 연구는 기존에 문헌과 고지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바 있다. 발굴조 사는 비교적 근래인 2012년부터 동성벽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자료가 일부 축적되었으나 이를 토대로 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본 고에서는 경주읍성의 범위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5구간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경주읍성의 동성벽과 북성벽 일부에 대한 축조과정과 시기에 대하여 간략하게 검 토를 해보았다. 그 결과, 경주읍성의 동성벽은 토성에서 석성으로의 개축 양상이 명확히 확인되었으며, 북성벽은 처음부터 석성으로 쌓았음이 확인되어 토성과 개축된 석성의 범위가 서로 달랐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벽 형태, 토층 등을 통한 개축과 수축부의 구분, 소량이지만 해당시기 를 판단해볼 수 있는 유물 등을 통해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전기에 토성 축성 이후, 고려시대 말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석성의 1차 수축은 조선시대 전기, 2차 수축은 조선시대 중기 또 는 임진왜란 이후에 대대적으로 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문헌과도 대체로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경주가 고려 개국과 함께 지방도시로 전락하면서 현종(顯宗) 대 에 토성으로 축성되고 우왕(禑王) 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조선 세종(世宗) 대와 문종 (文宗) 대에 규식에 맞도록 수·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생물다양성협약 (1992년)과 나고야의정서 (2010년)의 체결 이후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보전과 생물자원 확보를 위한 자생생물의 조사·발굴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2007년에 설립된 환경부 소속 국립 생물자원관의 주도로 “한반도 자생생물 조사·발굴 연구사업”이 진행되었다. 본 사업은 2006년 이후 현재까지 15년 동안 5단계 (1단계 2006~2008년, 2단계 2009~2011년, 3단계 2012~2014년, 4단계 2015~2017년, 5단계 2018~2020 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연구의 결과, 본 사업의 이전에 29,916종 (2006년)이던 한반도 자생생물이 본 사업의 각 단계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누계로 집계하여 볼 때, 1단계 33,253종 (2008년), 2단계 38,011종 (2011년), 3단계 42,756종 (2014년), 4단계 49,027종 (2017년), 그리고 5단계 54,428종 (2020년)으로 급속히 증가하여 본 사업 기간 동안 한반도 자생생물 기록종이 약 1.8배 증가하였다. 이 통계자료는 이 기간 동안 연평균 2,320종의 한반도 미기록종이 새로이 기록된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체 발굴종 중에서 총 5,242 종의 신종을 기록하는 학술적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분류군 별로는 총 연구 기간 동안 곤충 4,440종 (신종 988종 포함), 무척추동물 (곤충 제외) 4,333종 (신종 1,492종 포함), 척추 동물 (어류) 98종 (신종 9종 포함), 식물 (관속식물과 선태식물) 309종 (관속식물 176종, 선태식물 133종, 신종 39종 포함), 조류 (algae) 1,916종 (신종 178종 포함), 균류와 지의류 1,716종 (신종 309종 포함), 그리고 원핵생물 4,812종 (신종 2,226종 포함)이 한반도에서 새로이 기록되었다. 생물표본은 각 단계별로 집계하여 볼 때 1단계 247,226점 (2008년), 2단계 207,827점 (2011년), 3단계 287,133점 (2014년), 4단계 244,920점 (2017년), 그리고 5단계 144,333점 (2020년)이 수집되어 연평균 75,429점, 총 1,131,439점의 생물표본이 채집되었다. 그중에서 곤충 281,054점, 곤충 이 외의 무척추동물 194,667점, 척추동물 (어류) 40,100점, 식물 378,251점, 조류 (algae) 140,490점, 균류 61,695점, 그리고 원핵생물 35,182점이 채집되었다. 본 사업에 참여한 각 단계별 연구원/보조연구원 (주로 대학원생)의 수는 1단계 597/268명, 2단계 522/191명, 3단계 939/292명, 4단계 575/852명, 그리고 5단계 601/1,097 명으로 전체년도의 참여연구자는 연평균 395명, 총 연인원 약 5,000명이 참여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분류학자와 분류학 전공의 대학원생이 참여하였다. 본 사업 기간 동안 전문 학술지 논문 3,488편 (국내학술지 논문 2,320편, SCI급 국제 학술지 논문 1,168편 포함)이 출판되었다. 본 사업 기간 중 자생생물 조사·발굴 사업 및 생물표본 확보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총 833억원 (연평균 55억원)이다. 본 사업은 국가 주도의 대형 연구 프로젝트로서 전국의 거의 모든 분류학자가 참여하고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 단기간에 이루어 낸 한국식 압축성장의 한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본 사업의 종발굴 성과는 최근의 생물분류 체 계로 분류되어 국가생물종목록으로 만들어졌으며, 전문가와 학생 및 일반 시민에게 제공되고 있다 (https://species. nibr.go.kr/index.do). 본 사업에서 파생된 기재문, DNA 염기 서열, 서식처, 분포, 생태, 이미지, 멀티미디어 등 각 종의 정보는 디지털화되어 생물의 계통, 진화 연구 등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였고, 기후변화에 따른 지표종의 변화 같은 생물 분포 모니터링 사업과 바이오산업의 생물소재를 탐색하는 기반이 되었다. 본 사업을 통하여 젊은 분류인력 (주로 대학 원생)의 양성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본 사업이 가져온 가장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5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본 사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동안 발굴된 종 들에 대한 이명 (synonym)과 오동정 등을 바로잡아 학문적인 완성도를 높이고, 한반도에 존재하리라 예상되는 약 10만 종의 자생생물 중에서 남겨진 5만 종에 대한 조사·발굴 연구가 지속되어야 한다.
본 연구는 급변하는 남북관계에 대응하여, 비정치적・비군사적 영역인 자연환경 분야의 남・북 협력 강화를 통해 한반도 생태공동체 구축 및 지속가능발전 기반 마련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환경 분야 대북 지원 사업 및 국제협력 사례 분석, 국제협력을 다루고 있는 북한의 국가계획 및 국제사회에 북한이 제안한 협력 사업을 분석하여 잠재 협력 사업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기존 사례고찰 및 1차 전문가 설문조사(5명)를 통해 “잠재 협력사업” 15건과 “사업 선정 시 주요 고려인자” 6개(①추진 시급성, ②한반도 연계성(한반도 생태공동체), ③지속가능발전(번영) 기여, ④북한의 수용성, ⑤추진 기반(협력 여건, 예산) 구비, ⑥사업의 지속가능성)를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2차 전문가 설문조사(14명)를 통해 우선 사업을 도출하였다. 자연환경 분야 15건의 잠재 남북 협력 사업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위하여 6개 주요 고려 인자를 적용하여 통합・평균한 결과, 사업 추진 우선순위는 ①설악-금강 국제평화공원 지정 추진, ②임농복합경영(agro-forestry) 지원・협력, ③국제적 중요 이동성조류(저어새, 두루미 등) 공동 보전사업, ④남북 생태관광 연계・활성화, ⑤한반도 대표 생태계 및 생물다양성 통합정보 구축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에서 제시한 우선 협력 사업들은 기존 협력사례와 협력여건을 고려한 자연환경 분야 남북협력 전문가들의 인식에 근거하여 도출한 결과이며, 향후 실질적 추진은 사업별 성격에 따라 남・북한 간 추진 공감대 형성, 적합한 파트너와 협력체계 구축 등을 포함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축성된 월송포 진성은 1970년대까지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70년대 이후 주변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월송포 진성의 남쪽 일부가 울진군에서 추진하는 망양-직산간 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됨으로 인하여 추진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문지, 우물 등이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진성은 해안에 접한 해안평탄면에 형성된 사구의 남쪽 말단부에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으로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천연의 해자를 이루는 형태이다. 이는 인접한 울진포영 및 남해안 일대에 위치하는 영ㆍ진ㆍ보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성벽은 후대 교란으로 인하여 동쪽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지적도상의 지번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지적도를 참고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둘레 328.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와 문헌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3.1~4.7m 정도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다. 성벽의 안쪽 에는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우물이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 안쪽으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풍경화에서 보이는 문루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월송포 진성은 인접한 대풍헌의 현판과 『조선왕조실록』등을 통하여 삼척영과 함께 3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울릉도 ․ 독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사건을 계기로 1694년 처음 시작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토사의 출발지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으로 파견되는 관계로 초기에는 삼척부의 장오리진, 울진현의 죽변진, 평해 군의 구산포 등 수토관의 위치와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구산포로 고정되었다. 이는 동해의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울릉도과 가장 가깝고, 항해에 해류와 해풍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산포임을 파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Sewon was a new type of private academy established by a class landed Confucian scholars known as sarim. During Joseon dynasty, sewon had dual functions as a shrine and a place of learning. The site plan of seowon appeared mainly two types of site plan according to the indications of the age and school. This paper was done to analyze the site plan and construction history of Simgok seowon with historical materials and excavation investigation result. Simgok seowon is dedicated to Jo Gwang-jo(1482~1519). This private Confucian academy was founded in 1605 as a small shrine, which was destroyed in 1636. Thereafter, when the shrine received a royal warrant naming as Simgok seowon in 1650, the new site for the seowon was chosen, which is currently located in Gyeonggi-do Yongin-si Sanghyeon-ri 203. Since then, buildings of Simgok seowon was constructed and repaired couple of times. Through the investigation, it was found that the site plan of Simgok seowon was originally a type of ‘jeonjaehudang’, that is, dormitory building between the lecture hall and the outer gate, or dormitory building is in front and lecture hall is in behind.
동고산성(東固山城)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대성동 일원의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시의 동남쪽 해발 300m 남짓한 승암산(僧巖山)을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 1,574m, 동서 길이 314m, 남북 길이 256m이다. 성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서쪽구간 중 일부는 기암절벽을 이용하여 쌓았다. 특히 남쪽과 북쪽으로 뻗은 자연 능선을 감아 용도(甬道)와 같은 날개모양의 익성(翼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고산성의 조사는 주로 내부 시설에 대해서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에 동고산성의 축성방법, 시기, 성격 등을 파악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5차 조사부터는 북문지, 동문지, 남성벽 등 성벽시설에 집중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동문지는 일자문 형식의 현문식 구조이며, 동문지 주변성벽 내벽부의 돌출부, 차단벽, 성벽외부, 남쪽측벽 등에서 개축 또는 수축의 흔적이 보임으로써 2차례 이상의 개축 또는 수리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형태를 보면 우선 성벽 안쪽에 차단벽(내옹성)을 두고 차단벽와 성벽사이에 양쪽으로 갈라지는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였으며, 1차례 이상의 수리과정을 거쳤다. 성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고, 상부에서는 내벽을 일부 축조하였다. 지대석은 경사진 곳에서는 계단식으로 흙을 잡석과 섞어 다진 다음 쌓았고, 암반이 있는 곳에서는 그랭이 기법을 사용하여 쌓았다. 외벽은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약간 배부른 형태의 장방형 또는 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였다. 내벽은 바닥에 흙을 먼저 다지고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의 석재를 약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남성벽에 위치한 집수지는 초축시기에는 평면형태 원형의 집수지를 사용하다가 이후 규모를 줄여 평면 말각장방형으로 사용하였다. 배수시설(수구)은 성벽내측으로 암거식과 개거식의 배수구를 만들어 성내부의 물이 효과적으로 입수구를 통하여 배출될 수 있도록 하였고, 성외부에는 바닥에 할석과 잡석을 깔아 물이 잘 흘러내려가도록 하여 물이 고이거나 폐여 성벽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동고산성은 ‘全州城’ 명 기와를 근거로 견훤의 후백제 都城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었으나 궁성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지형상 평지가 적고 성내부가 좁아 궁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에서도 생활용기와 철제무기류 등의 출토량이 소수에 불과해 상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시설일 가능성 또한 낮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주성’명 기와는 전주시내와 동고산성 등을 포괄하는 도성(전주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성은 전주시내 일원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동고산성은 그 궁성의 배후산성으로서의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Studies and reports on buddhist temples in Goryeo dynasty are rarely in the present situation. At this point of time new excavational reports and historic records offer many materials to understand a architecture in Goryeo period. Especially, temple site have various transitions, it is of great value to study. This article attempted a restorative study of a location, function, spacial arrangement, structure, building age is based on a measure and transition of temple layout that is based on the excavational result and related historic documents about Godal temple site in Yeoju. Godal temple site was a representative Zen buddhist temple in Goryeo Dynasty. It was difficult of access by watercourse because it was located in an inland in the upper Han River. Archaeological research and historical records has reveals that the temple was constructed with a minium of four levels[six terms]. We could recognized the central site of temple and buildings were constantly established, enovated or collapsed. It has went through many transition according as it encountered new sects and doctrines. Also it should perform various functions and overcome given conditions. Ultimately it let see greater diversity in the spacial composition, and layout. That is to say it were planed several separate areas, each was consisted of main buildings, once again was integrated into one te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