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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1946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시행한 성경학원 정책을 연구한다. 기존 성경학교 정책과 달리 새 정책은 한국교회(노회)가 주도적으로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선교사는 보조자 역할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각 노회는 지역 선교부와 함께 평신도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이 논문은 3가지 형태의 성경학원을 규명했다. 첫째, 표준적인 성경학원의 입학 조건을 채우지 못한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각 선교부의 성경학원, 둘째, 성경교육의 질을 높이고 표준을 제공하는 선교회의 성경학원으로서 호남신학원, 셋째, 당시 경제적으 로 어려운 여성들을 교육시켜 여자전도사를 배출하는 한일여자신학원 이다. 결론으로 한국선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서술하고 두 신학교의 발전과 신학교육적 영향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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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글은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선교 초기(1902-1925)에 행한 한국인 전도부인 양성과 교육 정책을 연구한다. 한국선교회는 학생들의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여 4가지 형태 즉 4일 시골교회 사경회, 10일 선교부 성경반, 1달 성경학원, 2개월 선교회 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변화하는 1920년대 상황은 2년제 선교회성경 학교의 예비과정으로 2년제 초급여자성경학교를 1923년에 세우게 하였다. 한국선교회는 이 2개 학교의 학생들을 위하여 자조적 산업부를 만들어 학생들의 학업을 도왔고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본 글은 이 연구를 위하여 주로 제1차 자료인 한국선교회의 연례회의록과 선교사 들의 선교보고를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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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2.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를 책임 진 조지송의 산업선교 활동을 제시하고 그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의 선교로부터 얻는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는 평신도를 통한 산업전도, 노동 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소그룹 활동으로서의 산업선교로 전개되었다. 그의 산업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십자가의 길로서의 산업선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현존으로서의 산업선교, 디아코니아로서의 산업선교, 노동의 신학과 산업선교, 산업선교와 돈, 노동조합 교회론: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산업선교와 구원 론, 바보들의 행진, 어릿광대 공동체로서의 산업선교이었다. 그의 산업선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무자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 실무자와 노동자 및 학생, 목회자,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교육의 언어는 몸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언어, 산업사회에서 현존으로의 선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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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흔히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은 18세기말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로부터 시작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바톨로뮤 지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 1682-1719) 와 하인리히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5-1752)의 선교사역 이 캐리보다 100년 가까이 앞서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1706년부터 1745년까지 인도 남부에서 추진된 덴마크-할레 선교회의 사역을 재정 적으로 후원했던 영국 성공회 선교부의 선교협력을 살핀 후에 선교지에 서의 선교협력이 근대 선교운동에 미치는 선교적 함의를 생각해 본다. 인도 트랭크바르로 파송된 독일 루터파 선교사들의 독일어 선교편지는 영어를 비롯하여 화란어, 불어 등으로 번역되어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베를린, 할레, 영국 런던 등지에 널리 배포되었다. 그 결과 할레 선교보고 서는 유럽 개신교회에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덴마크-할 레 선교사들은 독일 경건주의 본산인 할레대학에서 훈련받은 후 덴마크 루터파교회의 파송을 받았으며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영국 성공회 선교기관인 기독교지식보급협회(SPCK)의 도움을 받았다. 트랭크바르를 중심으로 전개된 초교파 선교협력은 세계선교 역사상 최초의 에큐메니칼 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덴마크-할레 선교회의 선교협력은 19세기 개신교 선교운동과 20세기 에큐메니칼 협력선교의 좋은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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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3.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Korean Church is well-known as the Church which conducts missionary works. Despite the short church-history, the Korean Church has not only considerate passions and dedicated attitudes toward Mission, but also human resources and material resources needed to the missionary works. Thus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Korean Church stands on the rank of countries that are responsible for the World Mission. The Korean Church’s Mission has several distinct features, which are church-centered, Denominational Mission Department-centered sending-missionaries and then not setting up enough infra-structure. Upright Mission is accompanied by administrating and caring missionaries as well as gathering and choosing suitable people, sending and supporting them as missionaries, and making them settle in the mission field and grasping their missionary works. However, the Korean Church’s Mission is, so to speak, to be doing ‘Sending-centered Mission.’ Mission is recognized only to send missionaries and supporting their living expenses. Because of these reasons, Denominational Mission Department or Missionary Society beyond the Denomination don’t consider setting up intra-structure as the principal assignment. Currently, the Korean Church’s missionary model seems the Church-centered Mission model but, in fact, sending missionaries is carried on each church-centered events, for which primary structures and systems needed in conducting the missionary works are not equipped. Each church-centered sending-missionaries and Mission on the basis of sponsorship structure causes various problems in the choice of missionaries and their missionary activities. In many cases, to choose missionaries and to support them is done impromptu rather than designedly. There is no long-term missionary policy to supervise, manage, and take care of missionaries. The responsibility of all the missionary works is left to the missionaries alone. In order to perform the right Mission continuously, it is not sending many missionaries but establishing and operating frames and structures to support the working missionaries systematically that is the most urgent task. This article is to suggest the real alternative by recognizing the problems of Mission and realizing heartfelt the need of the infrastructure on Mission. After seizing pros and cons between each church-centered Mission model and Mission Society-centered Mission model, it is to search for solutions on structural problems which have been revealed in each church-centered Mission system in Korea Church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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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2.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한국 도시산업선교운동의 선구자 조지송의 생애, 산업선교정 책, 그의 노동자선교 신학 사상을 고찰하고, 그의 활동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조지송은 보수 적 친미 반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한에 온 피난민이었다. 그는 산업전도 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 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발견했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 정책을 네 단계로 발전시켰다. 1 회사 사주와 협력하는 노동자 전도 2. 훈 련된 평신도를 통한 공장 전도 3.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선교 4. 소그룹 안에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주체성 회복을 통해 산업현실을 개혁하는 산업선교. 조지송은 노동자 기독론과 노동조합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변화된 노동자의 성숙한 인격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헌신성에서 희망 와 용기를 발견했다. 독재정권과 비윤리적 기업과 협조해서 산업선교를 탄 압하는 제도교회를 거짓교회로 보았다. WCC와 CCA는 한국의 도시산업선 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운동이 세계교회 와 인류 노동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7.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외국 교회의 지원에 의해 개척된 최초의 재일 한인교회 미카 와시마(三河島)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되 특히 동 교회의 설립과 발전, 교회적 특성, 타교단 한인교회들과의 협력과 교류에 주목하였다. 미카와시마 교회는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와 연계된 재일 요츠야선교회 소속 제5교회의 한국인 교인에 의해 1926년 개척되어 한국인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성장하였다. 동 교회는 1940년대 초반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편입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탈퇴하고 종전의 미카와시마교회로 재건 되었다. 동 교회는 1960년대 초 요츠야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치, 자립 하는 지역교회가 되었다. 미카와시마교회는 개척 후 3년만인 1929년부터 교인 100명 이상이 출석하는 한인교회로 성장하였고, 한국교회와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유악기)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였다. 동 교회는 한국인 사역자(목사 혹은 전도사 혹은 장로) 혹은 친 한국적 일본인 사역자(오다)의 치리로 한국교회의 특징인 ‘전도(부흥)집회’ ‘새벽기도회’를 정착시켰다. 반면 요츠야선교회와 재정과 인적 유대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교회의 특징인 개교회의 자치권 을 계승받아 교단체제에 반대하고, 재일 한인교단교회들의 연합체인 ‘재일 본조선기독교’나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기준으로 중시하는 교회가 되었다. 동 교회는 재일한인교회 연합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사역을 위해 타교단 한인교회(특히 연합공의회계 한인교회)와 복음사역에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8.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95년 미국 북침례교 계통의 클라렌돈가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 내에서 개인의 후원으로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체인 엘라씽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 이다. 본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 다음과 같다. 첫째, 엘라씽기 념선교회의 한국선교는 교파 선교회가 아닌, 한 개인의 헌신에 의해 설립 된 소규모 초교파 선교단체가 태평양을 건너 먼 이국땅 한국에서 선교의 열매를 맺은 첫 사례라는데 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84년부터 시작 됐는데, 주로 교파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4개의 장로 회 선교부(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빅토리아장로회선교회, 캐나다장로회) 와 2개의 미국 감리회 선교부(북감리교, 남감리교), 영국성공회가 그것이 다. 한편,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의 후원에 의한 독립선교사들도 속속 내한 하였다. 1888년에 입국한 게일(J. S. Gale)은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 (YMCA) 후원을 받았으나 1891년 미북장로회로 이적하였다. 게일과 함께 입국한 하크니스(R. Harkness)는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을 받았으나 1889년 6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 다. 1889년 펜윅(M. C. Fenwick)은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으로 내한 했으나 1893년에 귀국하였고, 1890년에 입국한 하디(R. A. Hardie)도 토론 토의과대학 기독청년회(YMCA) 후원으로 내한했지만 1898년에 미남감리 회로 소속을 옮겼다. 1893년에 입국한 매켄지(W. J. Mackenzie) 역시 캐나 다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1895년 일사병과 신열(身熱)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권총 자살함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초기에 내한했던 초교파 선교사들은 교파선교사로 이적하거나 귀국 또는 단명함으로 뚜렷한 선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엘라씽기념선교회는 약 6년간 한국선교를 지 속하여 교회설립이라는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둘째, 엘라씽기념선교회는 당시 선교지 분할정책 속에서 선교의 사각지 대를 잘 인식하여 선교를 시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교지 분할정책은 한국교회사에서 그 명암이 뚜렷할 정도로 공헌과 한계가 분명하다. 선교사 간에 불필요한 마찰 해소하고, 선교의 재정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데는 공헌했으나, 30년 이상 이것이 한반도에 적용되므로 인해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고, 지역성이 더해져 교권분쟁과 교파분열의 단 초가 되었다는 비판은 면할 길이 없다. 폴링의 충청도 선교는 남장로회의 전라도 선교 집중으로 인한 선교 사각지대를 효과적으로 접근했다는데 의 미가 있다. 처음부터 오지선교를 추구했던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의 빛이 난다. 교파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면서도 선교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 했다는 것은 선교의 후발주자로서 매우 바람직한 선교전략이 아닐 수 없 다. 물론 약 6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수고와 헌신은 헛되지 않았고, 훗날 펜윅에게 인계되어 한국 침례교회 형 성의 중요한 토대요 모판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활동 은 재인식되어야 하고,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