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관한 「進箚」를 올렸다. 그는 이 글이 충서의 글이라고 밝히면서, 주로 四書六經과 眞德秀 (1178~1235)의 『大學衍義』를 본떠서 편술하였고, 아울러 程子와 朱子의 학설을 보충하여 改進하였다고 한다. 이 책의 주요 구성은 修己․治人의 유교적 도를 설명하는 大學』과 『中庸』을 「統說」로 삼고, 이어서「修己」,「正家」,「爲政」,「聖賢道統」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그 분량은『栗谷全書』의 약 25%에 해당한다. 이 책을 편찬한 주된 목적이 ‘리더’로서의 제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천하는 내용들로 편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고는 이러한 제왕교육서인 성학집요의 「수기편」을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리더십교육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의 리더십 교육은 대체로 서구권의 연구 업적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리더십을 『聖學輯要』에서 찾는 것은 단순한 古代로의 역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리더는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필요한 존재였다. 인간이 혼자 살수 없는 존재인 이상, 사회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에 본고는 오늘날의 리더양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성학집요 수기편을 살펴보았다.
『大學類義』는 정조가 『대학』을 토대로 편찬한 군주 聖學의 교재로서 『聖學輯 要』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 『성학집요』 강독과 함께 抄出 작업 을 진행하였으며, 이것은 정조 5년 『聖學輯略』으로 완성되었다. 『성학집요』에 대한 이해는 『大學衍義補』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대학유의』 편찬으로 귀결된 것이다. 『대학유의』의 편찬은 『大學衍義』와 『大學衍義補』의 내용을 초출하여 재편집 한 것이지만, 나아가 국왕의 입장에서 『大學』의 정신을 체득하고 스스로 聖學 교재를 편찬하려는 것이었다. 『대학연의』의 내용 중 「帝王爲學之本」에서 三代 이후 군주의 학문에 대한 3개 세목을 삭제하였는데, 이는 君師로 평가받는 삼대 의 군주만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治國・平天下의 구체 적인 통치술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는 삼대 군사의 이념도 구체적인 통치 과 정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대학』이 추구한 全體大用의 학문체계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지향은 앞서 『성학집요』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이이는 『대학연의』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통치 과정에 대한 내용을 수용하여 『대학』의 이념을 재구성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학연의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담긴 통치술 을 대폭 수용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군주와 신료를 포함하는 보편 적 관점에서 효능을 말하고 군주에게 수신을 강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 는 『대학유의』를 통해 太平의 임무를 가진 국왕을 중심으로 놓고 여기에 신료 들의 보좌 역할을 규정함으로써 『성학집요』의 성학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이의 대표적인 저술인 聖學輯要는 일각에서 帝王이 학문하는 교범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나 그가 초년에 出家했다는 혐의로 인해 정계의 관심 대상이 되지는 못하였다. 성학집요는 庚申換局에 이어 숙종 7년에 이이의 문묘 종사 가 실현된 것을 계기로 吳道一과 朴世采 등은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며 성학집 요의 진강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으나 서인 집권 당시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정계 일반의 논의는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며, 진강 또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이는 己巳換局으로 그에 비판적인 남인이 집권한 뒤 문묘에서 黜享되었으 나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復享되었다. 당시 숙종은 유생들의 상소 나 대신들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특명으로 복향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처 분을 거듭 뒤집는 데 따르는 명분적 부담을 피하는 한편 公論이 당론에 따라 움 직이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한 국왕의 정책 주도권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이이의 학문적 성과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여 이이의 위상을 처음 종 향보다 한 차원 높임으로써 從祀의 당위를 확증하기 위하는 조치가 수반되었는 데, 그 산물이 바로 聖學輯要의 進講이었다. 기사환국 이후 성학집요의 가 치를 주장하며 이이의 복향을 청하다 옥사한 延最績이 갑술환국 후 복권된 것 은 성학집요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성학집요는 숙종 23년부터 27년까지 진강되었는데, 이 작업은 宣祖에 대 한 繼述로 평가되었으며, 숙종은 이이의 학설을 聖賢의 謨訓으로 평가하여 그 의 위상을 확증하였다. 한편 현전하는 성학집요 중 숙종 22년 9월에 進善 權 尙夏와 侍講院에 내린 內賜記가 적힌 것이 있다. 이것은 숙종 자신이 성학집 요 진강을 통해 경연관들과 군신의 관계를 확인하고 있다면, 시강원 관원들에 게 성학집요를 내려줌으로써 어린 세자에 대해 동일한 의미를 표상하고자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