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시절 제작한 화첩이다. 영조 18년(1742) 10월 보름날,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가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 중에 삭녕 우화정으로 경기도 관내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여 연천의 웅연까지 뱃놀이를 즐겼고, 정선은 이 이벤트를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두 점으로 그렸다. 그림의 제목대로 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과 웅연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장면을 각각 담은 것이다. 이 모임은 같은 임술년(1082)에 가졌던 북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660년 전의 고사(故事)를 추모하여 재연한 행사였던 셈이다. 이를 밝힌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 ‘의적벽부(擬赤壁賦)’ 일부, 그리고 정선의 발문(跋文)을 합하여 꾸민 서화첩이 《연강임술첩》이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화첩본 이외에 새로이 2011년 11월 필자가 참여한 동산방화랑 기획전에 또 다른 《연강임술첩》이 공개되었다. 정선이 화첩의 발문에 밝힌 대로 세 화첩 가운데 두 번째가 출현한 셈이다.《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도6)과 〈웅연계람〉(도7) 두 폭은 소동파 적벽부 관련 고사도이자 실경산수화이면서, 동시에 경기도관찰사의 선유 행사를 담은 기록화이다. 옆으로 긴 화면을 적절히 소화한 대가다운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고운 비단에 비교적 강한 먹을 쓰고 옅은 담채와 먹의 농담으로 늦가을의 정취가 살짝 감돌게 그렸다. 강변의 절벽과 암봉(岩峯)은 북종화풍인 농묵의 부벽준(斧劈皴)을, 먼 토산과 근경언덕은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의 남종산수화풍을 구사했다. 남북종화풍을 조화시켜 임진강변의 풍광을 그렇게 담아낸 것이다. 겸재가 통상 현장사생을 거의 하지 않았듯이, 아마 두 점도 관아에 돌아와 기억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했을 것으로 본다. 실경그림과 실경현장을 비교하기 난감할 정도로 이상화 시켜 놓았다. ‘의취(意趣)를 살리며 외형 닮기에 소홀히 했다’는 당대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지적을 실감케 하는 진경작품이다. 그리고 좌우로 긴 풍경에 행사장면과 그 주변 등장인물이나 경물들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기록화적 성격까지 적절히 살려놓은 명작이다.
본고는 金萬重이 南海 謫所에서 『三國志演義』를 비롯한 통속소설 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문학이라고 하였고, 『東坡志林』에 서는 통속소설을 짓는 까닭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그가 蘇 東坡를 同一化樣相이라는 점에서 모종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 『서포만필』 소재 일화를 통해 그의 소설 성립의 배경에 대한 전후사 정을 살펴본 것이다. 『西浦漫筆』은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서포만필』은 서포소설의 컨텍스트를 파악하는 측면에서나, 텍스트 와 컨텍스트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신빙할 만한 일차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포만필』 탐구는 서포소설의 해석 시각을 새롭게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리라 생각 한다. 필자가 원전을 독파해본 결과, 서포가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유배문학이 소동파가 海南島에서 남긴 유배문학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 으며, 일정부분 차이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는 『서포만필』 분석을 거쳐 김만중이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을 통하여 서포소설 성립배경 과정을 일화 관련 기사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김만중은 『서포만필』 하권에서 소동파 관련 일화 기사를 통하여 漢詩 창작만을 고집하던 종전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소설 창작 의 효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유의 특징이 결국 남해적소에서 서 포소설 창작의 모태가 되었음을 추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