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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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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에서는 소백산맥 서록에 축성한 신라 산성에서 관찰되는 수축 부분을 통해 신라 축 성 기술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이 지역 산성의 수축은 주로 성벽 구조에서 확인되 며 가장 큰 특징은 입면을 구성하는 성석의 변화로 파악된다. 초축 성벽에는 주로 할석가공 석이 사용되는데 반해 수축 성벽에서는 화강암 계열의 석재를 방형~장방형으로 다듬은 절 석가공석의 비중이 높아진다. 그리고 절석가공석으로 수축한 성벽 구조에는 들여쌓기 기법 이 다수 적용된다. 성벽과 더불어 치성, 성문, 성내 집수시설 등에서도 수축 부분이 관찰된다. 해당 부분에서 도 축조재료로 다듬은 절석가공석을 사용한 양상이 다수 확인된다. 성벽을 비롯하여 산성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유사한 기법으로 수축되는 현상은 해당 산성이 초축 이후 오랜 시기 동 안 중요하게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축성에서 절석가공석의 등장과 들여쌓기의 보편화는 경주 남산신성의 증축 성벽 을 표지로 하여 7세기 후반경으로 파악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축성 기법의 도입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축성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 였다. 더불어 신라는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국 각지 에서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동원된 지방인들의 축성 경험이 각 지방 성의 축조에도 적용 되어 신라의 축성이 일정한 보편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축성 기술의 적용과 확산에는 신라군에 소속된 축성 기술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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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3,200원
        4.
        2016.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 하구의 남쪽 곶(산)에 입지한 오화리산성의 신라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고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고고자료로는 산성에서 수습된 신라토기를 분석하고, 할석 이 피복된 토루 성벽 축조 방식을 찾아 오화리산성을 5~6세기의 신라성으로 추 정하였다. 문헌자료로는 오화리산성 주변에 신라계 지명과 채록 자료를 찾아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이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으로 추정되므로, 이 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실직(주)성[悉直(州)城]으로 볼 수 있으며, 「울진봉평신라비」의 실지도사(悉支道使), 실지군주(悉支軍主)가 주둔하였던 성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이 성의 신라사적 의미는 강 하구의 바닷가 곶(산)에 입지한 점에서 최 근 발견조사된 강릉 경포호 옆 강문동 신라토성과 통하고 있어 신라의 동해안 연 안항해(沿岸航海)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결국 오화리산성 일대는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연안항해를 위한 중간 기항지(중간거점)로 기능하다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신라의 방어 거점 기능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통일신라시대 때 오화리산성 일대를 북해(北海) 중사(中 祀) 비례산(非禮山)의 무대로 정하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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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신라왕조(BC57∼AD935)는 초기의 느린 발전과정을 극복하고 독특한 성벽을 축조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5세기 후반에 성립된 새로운 성곽축조의 기법은 이후 6세기 중엽에 낙동강 유역과 한강유역까지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보급되고, 7세기 후반에는 한반도의 서남부와 이어 북부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 남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신라의 산성들은 대략 5세기 후반 독특한 석축 기술에 의한 가장 견고한 구조의 석축성벽의 축조 이외에도, 독특한 양식의 치성, 성벽의 중간을 통과하도록 만든 배수구조, 뿐만 아니라 성문의 바닥 높이를 높이고 출입 차단시설을 이용해 방어력을 향상시킨 독특한 현문양식을 채택하였다. 이 글에서는 현문구조에 대한 중세의 문헌기록부터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 초기와 고려왕조의 현문과 현교 등의 자료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소급하여 고고학적 자료에 나타난 현문구조의 성문을 유형별로 구분하고, 그 분포양상을 살폈다. 신라의 석축 성벽과 함께 축조된 현문양식은 동일한 형식의 성문이 신라 영역의 전 지역에 걸쳐 선택적으로 채택되어 확산되었다. 그 시기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미 이웃 백제왕국의 변경에도 적용된 사례가 있다. 대략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이후에는 더욱 분포범위가 확대되어 병합된 지역의 일부에서는 종래의 성문이 현문양식으로 개축되어 사용된 사례들이 조사되었다. 신라에서 성립된 현문양식의 성문구조는 그 변형된 모습이 공간적으로 더욱 확대된 분포로 나타난다. 시간적으로는 신라왕조에 이어 다시 지속된 중세의 고려왕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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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신라왕조의 석축 산성에서 조사된 성벽을 관통하는 배수장치에 대한 기왕의 연구를 보충하였다. 조사된 사례가 3개소에서 12개소 이상으로 증가된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를 반영하여 형식적 구분을 다시 하였다. 성곽에서의 배수장치로서의 수문은 교량형(橋梁形)과 암거형(暗渠形), 누조(漏槽)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글에서는 특히 성벽 통과형 암거형식을 다루고, 그 시설된 숫자에 따라 단구식(單口式)과 다구식(多口式)을 구분하였다. 다구식은 성내의 수위 변화에 대비하여 수위(水位)에 따른 배수가 가능하게 만든 것들이다. 종래 출수구(出水口) 외면의 형태에 따라 형태를 구분하였던 점을 고쳐서 입수구와 출수구를 잇는 수로의 횡단면 형태에 따라 오각형, 사다리꼴, 사각형에 추가하여 삼각형의 유형이 있음을 새로 추가하였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방형 단면의 것들이며, 이런 형태는 신라 하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나머지 형태는 신라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축조되었다. 이들 여러 형태 가운데 단면 사각형은 중세와 근세의 산성까지 가장 오랫동안 시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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