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대한장로교회 신경의 변천과정과 장로교회 각 교단의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1907년에 제정된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로 이름이 변경되고, 1934년 수정과정에서 문구의 수정 및 단어의 추가나 삭제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해방 후 장로교회 각 교단은 대부분 1934년의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저본으로 해서 현대철자법에 맞게 수정한 후 헌법에 수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예장 고신 교단은 2011년 개정, 공포된 헌법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을 삭제했으며, 예장 통합 교단은 1971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서언을 축소하고, 승인식을 삭제했으며, 제12조의 내용 중 불신자가 최후 심판 때에 형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역사적인 기원과 개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헌법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제정한 후에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사용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종교개혁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환(Alloeosis)” 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반박되어지고, 그에 의하여 “속성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로 주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속성간의 교류에 상응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신학에서 삼위의 “순환”(“사귐”)으로 전해지면서 신학용어의 오용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양성이 상호내재, 침투하여 연합 하는 신학이해가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원 의도를 약화시켰다. 교부들이 즐겨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사귐(communio κοιν ωνία), 참여(participatio),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함께 나누다’(socio), ‘관계’(societas 교제, 사회)를 사회적 삼위일체신학을 위해 사용했으면 훨씬 나을 뻔했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류와 삼위일체신앙 이해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속성간의 교류를 위하여 ἀντίδοσις ἰδιωμάτων, περιχώρησις가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연합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속성 간의 교류, 상호내재, 상호침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신 학은 보나벤투라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과 인식, 이성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고백은 한 순간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발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1세기 초기 단계의 신앙고백부터 공의회의 결과물로 나온 4세기 발전된 신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계속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정통신앙고백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각 시대마다 존재했고, 초기에는 대부분 사도적 기원으로 판단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기준이었지만, 다양한 성경해석의 문제 앞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사도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성경해석과 그들의 신앙은 정통이라 인정받았고, 이러한 사도성에 기준을 둔 신앙고백은 발전해서 4세기 공의회를 통한 신조까지 이어졌다. 본 논문은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이외에 사도들로부터 인정된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들의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그 범위를 성서시대를 넘어선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중반 ‘신앙규범’(regula fidei)이 등 장하기 전까지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초기단계를 살펴보았다. 이에 클레멘스 제 1서신과 이그나티우스의 일곱서신과 아리스티테스 저서와 순 교자 유스티누스의 저서를 다루면서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를 분석했다.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ain outline of Sujeong Lee’s thoughts of Christian faith and passionate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rough his two articles,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Sujeong Lee who became an associate member of the Korean delegation to Japan, headed by Younghyo Park(朴泳孝) arrived in Japan on September 29, 1882. He met Dr. Tsudasen(津田山), a Japanese scholar of agriculture. And he was much impressed by Tsudasen’s deep-rooted faith and sincere piety to God. As a result, he had so much interest in Christianity and dedicated to studying the Bible and various Christian books. By studying these books, he sought after the essential truth of the Christian faith. Through Japanese faithful Christians he was brought into contact with George W. Knox, Robert S. Maclay and Henry Loomis who were pioneer missionaries in Japan. And on April 29, 1883, he was examined by Yaskawa(安川亨) and baptized by George W. Knox. While he was in Japan, he devoted himself to various Christian activities and studied Christian doctrine to increase his knowledge of Christian truth and faith. As soon as Sujeong Lee found a new truth and sublime faith in Christianity, he was eager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When he believed in Jesus Christ he confessed his faith to the missionaries and Japanese Christians through the famous article(“Confession of Faith”, 「信仰告白書」) that he wrote with all his heart and soul in May 1883. And then, seven months later, he wrote another remarkable article (“Conditions in Korea”, 「宣敎師派送呼訴文」) on December 13, 1883 to appeal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e main thoughts and principles Sujeong Lee left behind us through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s:
① the principle of ‘internal combustion & extension’: There is organic corelation between Sujeong Lee’s internal faith and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② triple methodology of effective mission for Korea: ‘Bible translationestablishment of church-inviting missionaries’
③ conservative faith: Sujeong Lee stressed the belief of apostolic faith, sola scriptura, sola gratia, and sola fide.
④ plea for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since he had showed strongly his earnest desire for American Christians to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⑤ indignity of mission: Sujeong Lee, the native Korean fully committed himself to the ministry of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
⑥ attempt to provide efficient policy for early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put a strong emphasis on Christian education.
⑦ mission initiated by Korean: Sujeong Lee was the pioneer Korean Christian.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his great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es:
First, he translated the Bible into his native language. When Henry Loomis, the American Bible Society directing manager in Japan had asked Sujeong Lee to undertake the translation of the Gospels into Korean, he was pleased to accept it. He then began, with the help of Chinese and Japanese Bibles, to translate the Scriptures into Korean such as ‘Hyeon To Han Han Shinyak Seong Seo’(4 Gospels and Acts, 1884), ‘The Gospel of Mark’(‘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1885), ‘The Gospel of Luke’(1885), ‘Romans’(1885) and so on. He believed with absolute certainty that the Korean Bible would be an effective means for extending the true Gospel to Korea without distortion. And he also expected that the Korean Bible would provide an effective tool for the early missionaries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Horace G. Underwood, Henry G. Appenzeller and William B. Scranton, coming to Korea through Japan, had in their hands ‘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in the Korean language.
Second. he shared the Gospel with Korean students in Tokyo and opened the Korean Sabbath School in 1883 for Christian education. He taught them the Bible and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Third, he appealed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He showed actively his ardent desire to send American missionaries to his motherland as soon as possible. So h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As a result of his efforts, the first ordained American missionaries, Horace G. Underwood and Henry G. Appenzeller came to Korea on April 5, 1885.
These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show that the early Christian mission activities in Korea was started by Sujeong Lee, the pioneer Korean Christ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