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중용지혜의 원형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 의 중용사상은 자사의 『중용』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설명된 중용사상과 유사성이 있었다. 그는 주관적 원추와 객관적 원추가 달의 상들에서 순환하 면서 중용을 완성하는 것을 가이어의 순환으로 설명하였다. 자사는 중과 용이 상호 조 화를 이루면서 중용을 성취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의 중간지점을 중용의 상 태로 설명하였다. 이 중용사상은 오이디푸스 왕과 이오카스테의 삶에 그 보편적인 전 형이 재현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중용지혜를 접목시키지 못하고 그것을 상실하 는 딜레마에 빠져서 결국 비극적 파멸을 맞이했다. 이 결과는 현대인들에게 중용이 얼 마나 귀중한 지혜인가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는 트라키스 여인들에서 비극적 사랑에 의해서 야기된 인 간의 고통에 대한 전형을 제시한다. 그는 이 주제를 통해서 중용지도의 지혜를 강조한 다. 예이츠는 이 지혜를 조화라고 말했으며, 자사는 중용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12과업을 완성하는 영웅의 삶을 살았지만 결국 아내, 데이아네 이라의 질투심에 의해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비극은 데이아네이라의 혼 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부조화를 이루는 삶에서 기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 연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주체와 객체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삶을 살다가 두 에너지가 충돌하여 비극을 자초한 것이다. 이는 주체와 객체, 정신과 육체,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추구하는 중용의 지혜를 강조한 것이다. 데이아네이라와 헤라클레스는 질투와 분노 때문에 중용의 부재로 바른 삶을 살지 못한다. 두 주인공은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고생하며, 죽음으로써 자 신들을 정화한다.
이 글은 조선시대 생산된 中庸圖說을 분석해 해석 양상과 특징을 논구한 것이다. 『중용』해석은 단락을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구조분석과 핵심주제어에 대한 심층해석으로 양분할 수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전자에 중점을 두어 도설을 통한 『중용』해석의 양상을 살핀 것이다. 조선시대 작성된 147개의 중용도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요지를 뽑아 그린 全圖는 30여 개이고, 나머지는 장별로 요지를 뽑아 그린 章圖이거나 人心道心 등 핵심주제어를 도표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全圖는 구조분석과 논리접속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어 『중용』해석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최초로 中庸全圖를 그린 인물은 영남학파의 張顯光인데, 그의 「中庸之圖」는 주자의 4대지설이나 6대절설을 따르지 않고 정자의 설에 자신의 견해 더해 5대절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 뒤 17세기 후반 기호학파 朴世采가 「中庸總圖」를 그렸는데, 장하주의 설에 의거해 4大支로 구분한 최초의 도표이다. 17세기 후반 韓汝愈는 남송 말 饒魯의 6대절설에 의거하여 독자적인 6대절설을 제시하였으며, 주자의 『중용장구』 33장 체제를 수용하되 제5대절의 편차를 일부 개편해 재구성하였다. 한편 18세기 전반 기호학파 李泰壽는 대절별로 6장의 도표를 그려 전체의 구조와 요지를 도표화하였으며, 金載海는 『중용장구』 33장을 1綱·2目·4結로 파악하여 독특한 중용도를 그렸으며, 李顯益은 제1장을 외곽에 그리고 그 안에 나머지 장을 그렸는데 4대지설에 의거해 단락을 나누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기호학파에서는 다양한 중용도가 그려졌는데,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韓元震의 중용도가 나온 뒤로 기호학파의 『중용』해석은 한원진의 4대절설이 널리 수용되면서 한동안 다른 성향의 도표가 나타나지 않고 大節圖나 章圖만 나타난다. 반면 18세기 전반 근기남인계의 李瀷은 『중용』도 『대학』처럼 經文과 傳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제2장부터 제11장까지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부분을 孔子中庸으로 보고, 그 나머지 장은 子思傳으로 보아 매우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인 愼後聃은 스승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중용도를 그렸다.
18세기 조선학계는 중앙학계와 지방학계로 확연히 구분된다. 중앙학계의 소수학자들은 청대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학풍이 변하였는데, 지방학계는 여전히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시대변화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학계에서도 영남학계와 기호학계가 다른 성향을 보이는데,『중용』해석의 경우 18세기 후반 이후 작성된 독창적인 중용도를 그린 학자 20명 가운데 15명이 영남출신으로 영남학계에서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모색을 하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영남지방에서 작성된 중용도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정자의 3분설,『중용장구』장하주의 4대지설, 「독중용법」의 6대절설,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통합하는 설, 3분설 및 4대지설과 6대절설을 모두 수용하는 설, 독자적인 5대절설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이진상과 그의 문인 허유·곽종석 등에게서 나타나는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하나로 합해 유기적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은 『중용』해석사에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 기호학파에서도 한원진의 설과 다른 설이 등장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중용도 가운데 章別로 요지를 파악해 그린 章圖는 제1장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제20장과 제33장을 그린 도표가 많이 보인다. 한편 중용도 가운데 『중용』을 이해하는 핵심주제어인 天命, 中庸, 中和, 九經, 天道人道 등을 그린 도표도 다수 발견되며, 「중용장구서」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序分節圖와 「중용장구서」에서 언급한 人心道心의 문제를 해명한 人心道心圖도 많이 발견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용』의 본지를 터득하기 위해 수많은 도표를 그려 논리구조와 논리접속을 파악하는 한편, 핵심주제어에 대한 부단한 논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특징을 가진 해석은 동아시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에서만 나타나는 해석의 특징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콘크리트용 후설치 세트앵커는 콘크리트가 경화된 후에 설치되는 앵커이며 시공 장비의 발달과 시공의 유연성 및 용이성으로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단하중을 받는 앵커는 강재 파괴, 콘크리트 파열파괴, 콘크리트 프라이아웃 파괴 등의 대표적인 파괴모드를 보 인다. 본 연구에서는 매입깊이, 연단거리 및 콘크리트 강도를 변수로 한 세트앵커의 실험 및 유한요소 해석 결과를 통하여 콘크리트에 매입 된 저하중용 후설치 세트앵커의 전단 파괴거동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매입깊이 변수의 실험 결과 매입깊이가 얕을수록 콘크리트 강도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연단거리 변수의 실험 결과 동일한 파괴모드를 보이면서 콘크리트 강도의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강재 파괴가 발생한 실험 결과를 비교해 보았을 때 콘크리트 강도가 클수록 변위가 상대적으로 더 작게 나타났다.
오늘날 유학은 그 존립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공자가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통치체계를 모델로 하여 정립한 것이 유학이다. 유학자는 경전과 육예에 밝으면서 여러 형태의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공자로부터 유학의 목적은 ‘극기복례’로 규정되었고, 이후에는 이 개념이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으로 확대되었다. 내면적 인격을 완성하고, 이를 통하여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왕조시대의 통치논리를 정당화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
본고는 유학의 현대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중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공자 이전의 유학은 ‘황극’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공자로부터 ‘중용’이 강조되면서 커다란 변신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북송시대의 승려인 계숭이 파악한 유학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왕조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오늘날 유학은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며, 그 중심에 근본 덕목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보면서 이를 ‘大公’으로 제시한다. 정치의 형태에 따라 고대 요순시대에는 천자가 중심이 되어 ‘황극’에 의지해 ‘덕화’를 시행하였으며, 공자 이후로는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중용’에 의지해 ‘교화’를 시행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국민 모두가 중심이 되어 ‘대공’에 의한 ‘同化’가 시행되어야 하며, 그 세부절목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大中至正’한 사회이다.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화국 체제에서 가장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학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의의 강조이다. 각종 제례에서의 예의는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공공예절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유학이 스스로의 존속을 위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예의 절목을 마련하여 모두가 함께 지키도록 홍보하는 일이다.
동아시아가 근세사회로 진입하면, 주자학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 다. 그러나 한중얼 삼국에서 주자학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본고는 야 점 을, 王夫之(중국), 이또진사이(일본), 정약용{한국)의 『중용』해석을 비교함으로써 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 고자 한다. w중용』가운데에서도 처1]1장에 나오는 천 성 도에 대한 주석을 그 분석 대상으로 한다. (1) 왕부지는 ‘천이 리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의 리가 된 뒤에 천야 리라는 뭇이 성립된다. 라고 하여 기를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성즉리‘를 긍정하연서도 이 라는 ‘거의 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천과 연성 은 동일한 기반을 갖는다. 이 점은 인성을 ‘연간에게 내재한 천도’라고 하는 명제 에서 확인된다. 자연의 음양 · 오행과 언간의 인의 · 오상이라는 덕목을 대응시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천도와 안도는 연속된다. 연성/울성, 인도/물도의 관계 에 있어, 왕부지는 철저하게 분리의 입장을 취한다. 인성=선, 물성=불선으로 규정한다. 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物道를 인간이 물을 이용하는 인도로 본다. (2) 진사이는 ‘천이 리’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주자학의 ‘이선기후’적 관점을 강하 게 비판한다. 그는 천을 원기로 보고 리는 그 조리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천 혹은 천도를 유행/주재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를 탈 도덕적 존재, 후자를 도덕적 존재로 본다. 전자는 인도와 구별되며, 후자는 인도가 도출되는 근거가 된다. 여기 에서 천도와 인도는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진사이는 ‘성즉리’를 부정하고 기질의 레벨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정강의 선지향성을 성선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으며 사물은 탈 도덕적인 닫힌 존재이다. 그려나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륜적인 규범을 인정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의 연속성이 확보된다. 천-인관계와 동일하게 인-물도 단절/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3) 다산은 천=리, 성=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천을 인격적 존재로 성을 선 지향적언 기호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의 영명성을 인간이 부여받아 영명무형한 본성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천-인은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 이 점은 천명이 인간의 도심에 내재하며 도심의 경고가 곧 천의 명령이라고 말한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사물은 자연성만을 갖는 닫힌 존재로 보아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세 명의 유학자들이 천-인, 인-물의 관계를 연속/단절로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지향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도덕성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왕부지가 중용의 성과 도를 인간에게 한정시킨 것은 ‘계신공구’라는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한 것이며, 진사이가 천의 주재성 및 도의 연륜성을 강조한 것과 다산이 천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을 기호로 보며 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가지, 동아시아 사회가 근세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천 • 성 • 도라는 유교 본체론의 핵심 개념 틀이 리에서부터 이탈하여, 기 • 정감 • 인륜 등 보다 구체적언 레벨에서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개념의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陽村權近(1352-1409)의 『중용』해석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양촌은 중용의 성격에 대해 주자처럼 道統論의 관점에서 ‘聖學의 心法’우로 파악하지 않고, 鄭玄의 경우처럼 ‘孔子의 聖德’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을 子思가 天 과 孔子로써 모범을 삼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양촌은 중용을 주자의 설처럼 도를 전한 책으로 보면서도 그 도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하는 敎· 學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였다. 셋째, 양촌은 『중용』의 分節(단락나누기)에 있어 大탑는 三節로 나누어 보고 細分해서는 五節로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새로운 설을 제 시하였는데, 이는 朱子의 四分節說이나 雙峯饒氏의 六分節說과 다른 독창 적인설이다. 넷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통한 요지파악에 있어서 주자의 설을 근간으로 하되,쌍봉요씨와 番陽李氏(李靖翁)의 설 중에서 장점을 모두 취하여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섯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정밀히 고찰하는 과정에서 단락을 바꾸는 서술체계에 주목하여, 새 단락의 첫머리에는 반드시 子思의 말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여섯째,양촌은 중용의 요지를 道와 德 으로 파악하여,제 1장부터 제 20장까지의 제 1 대절은 君子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21 장부터 제 32장까지의 제2대절은 聖人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33장 제3 대절은 결어로 파악하였다. 이는 주자가 제 1절은 中庸을 말한 것으로, 제2절은 費隱小大를 말한 것으로, 제3철은 天道人道를 말한 것으로 제4절은 결어로 파악한 것과 상당히 다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