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90년부터 베트남에서 활동해온 장요나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특히 장요나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교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장요나 선교사는 해당 국가가 복음전파를 금지 하고 있는 법을 어기고 복음을 전했다는 점에서, 본국에서 교단을 초월한 협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반면에 언더우드와 달리 장요나 선교사는 베트남 현지에 있는 선교사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을 의사로 사칭하며 선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과 자신의 질병을 돌보지 않고 선교사역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인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지속해온 장요나 선교사의 선교사역은 교회, 병원, 학교설립 등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는 점과 그가 추구하는 베트남을 포함한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인도차이나반도 선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교 현지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주민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은 과연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타자”에 대한 초기의 질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16세기부터 선교현장으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초기 질문을 16세기 후반 페루에서 제기했던 호세 데 아코스타(1572-1586)와 17세기 초반 남 인도에서 제기했던 로베르토 데노빌리(1606-1656)의 저술을 통해, 이들 선교사들이 어떻게 최초로 종교적 타자를 이해하고 분류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호세 데 아코스타는 1590년에 편찬한HISTORIA란 책을 통해 페루 지역의 원주민들이 콜럼버스 이전부터 유지해 오던 토착 종교를 면밀하게분석했다. 아코스타는 이 책에서 이중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아코스타에 의하면 페루 원주민들은 후아카스(HUACAS)라는 끔찍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수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중적인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그의 관찰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고 있는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미신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과연관이있다. 16세기 스페인 내부의 종교재판 기록과 아코스타의 페루 주민에 대한 비판을 비교해 보면 명백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깊은 종교성과 동시에 미신적인 의식을 선호했던 스페인 시골 주민들의 신앙에 대한 평가와 페루 주민의 종교성에 대한 평가가 흡사한 이유는, 아코스타가 페루 주민에 대한 해석에 사실상 스페인 시골 주민에 대한 이해를 투영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코스타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해석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내부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활동하며 이른바 상류층 우선 접근 선교방식으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경우에서도 같은 투영 현상이 나타난다. 데노빌리는 자신을 인도의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민과 동일시하면서, 심지어 브라민의 신 이해를 자신의 신 이해와 일치시키는 신학적 대담성을 보이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인도 사회에서 브라민 카스트가 차지하는 학문적, 사회적 위상을 자신이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과 차별되는 귀족 및 학자의 위상을 투영시킨 결과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투영의 과정을 1613년 어간의 인도 선교 역사와 비교하면서 로베르토 데노빌리의 “타자”에 대한 이해를 분석한다. 결국 아코스타와 데노빌리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은 종교적 타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의 이해 정도를 투영시켜 타자를 규정하게 된다는 것을 선교 역사적 경험과 남겨진 초기 선교사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ince 1884, many western Protestant missionaries came to Korea. The missionaries initially treated of the spiritual perspective of Koreans as superstitious and ignorance-oriented. Especially in the field of medicine, the Western perspective seemed to be far advanced than the Korean traditional perspective. According to the Korean traditional view, sicknesses was in many cases caused by intrusions of spiritual beings. Therefore, to cure the sick, one had to cast out those spiritual beings out of the bodies through placations or by force. With such perceptions, Korean people were not able to overcome the hard situations caused by the contagious diseases such as pestilence, small pox, and typoid fever. Western missionaries could take advantage on those matters in order to help Koreans and thereby achieving the trust of Korean government. Even though Western science and medicine proved their effectiveness through such medical works, excessive reliance can cause one to fall into the idolatry of worshipping medicine instead of God. Throughout the development in the area of science and technology, Westerners have tended to look everything through the scientific perspectives. Through such trends Western societies were believed to run the course of secularization throughout the 19th and 20th centuries. God and His supernatural world have been marginalized especially in public areas. According to Professor Paul G. Hiebert, even missionaries with severe Western cultural backgrounds have difficulties in understanding the spirit world of the native people. Early missionaries to Korea were not exceptions. They also had difficulties when they first met the Koreans and tried to understand their spiritual view points. In contrast to the Westerners who generally do not recognize the spiritual beings around them, the Koreans recognized the spiritual beings such as ghosts, ancestors in almost every aspect of their lives. Koreans were famous in maintaining the practices related to such spiritual beings throughout their ancient history. When the missionaries first observed practices related to the spiritual beings, they judged Koreans to be ingnorant or superstitious. However, the missionaries continuously tried to understand the people and their worldviews. When they were unable to understand the Korean worldview on the spiritual beings, they resorted not to the Western naturalistic perspective but to the Bible. Through comparison between the Korean traditional perspectives and the Biblical perspectives, they discovered that the Biblical perspectives were more similar to the Korean traditional perspectives. And with careful observation and examination of the Korean ministers’ deliverance works, they changed their thought about the spirit world. The demons and spiritual beings which were regarded to harass Korean people were not supterstitions or fatacies. They were real beings confirmed by the Bible. The native Korean ministers contributed a lot in the paradigm shift from Western perspective to the Korean perspective on the reality of spiritual beings. The Korean ministers viewed the Bible differently. They believed Bible stories where the possessed were released by Jesus and his disciples. The faith of Korean ministers proved to be simple and firm enough to follow the practices of Jesus and his disciples in casting out demons. When the missionaries heard about the stories of deliverances by the Korean ministers and believers, they did not stop but rather carefully examined such behaviors in light of the Bible. The final criteria of missionaries were not the western but the Biblical perspective. With such criteria, they accepted and recognized the deliverance ministries of the Korean believers. Some missionaries, when asked if they could cast out demons out of troubled, succeeded in the deliverance ministries. In my estimation, the Nevius mission plan contributed greatly in making harmony and cooperation between the missionaries and the Korean ministers. God brought Koreans who were troubled with spiritual bondage into the Kingdom of God through such faithful servants of God. The reasons the early protestant missionaries to Korea brought such great success in evangelizing Korea were foremost their deep reliance to the Bible as the Word of God and secondly their deep understanding of Koreans and their ways of thinking.
본 연구의 목적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를 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한국 무속 이해를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선교사들이 인식한 한국 종교 체계 속에서 무속신앙의 위치를 다룬다. 한국인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느꼈다고 선교사들이 인식했는지도 다룬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인식에 따른 다양한 행동들도 분석한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속에서 선교사들이 기복주의를 발견했음도 살펴본다. 악귀와 관련된 다양한 무속신앙의 치유방법들이 선교사들에게 목격되었음도 살펴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대결의 대상으로 삼았음도 확인한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경험을 토대로 책을 저술하였고, 편지, 잡지, 일기를 통해 그들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이해를 분석하여 정리하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소였던 장시(market)가 구한 말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을 밝히고, 장시가 복음의 장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복음 전도지로서 “장터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5세 기 중엽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조선 전역에 확산된 서울 뿐 아니 라 지방 포구를 중심으로 상품 유통의 중요한 발달을 가져왔다. 장시는 조 선 사회의 경제적 활성화를 견인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물, 신문화의 전파 통로이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끄는 기능도 하였다. 초기 입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장시의 특성을 파악하고 복음 전파의 중 심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로스는 국제 무역 장시였던 만주의 ‘고려문’에서 조선의 상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국경 무역장 시인 의주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한국의 풍토와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장시를 방문하였고, 19세기 말에는 개항지의 확대와 더불 어 전국 장터에 속속들이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이처럼 장시는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민족과 만나 어우러져 숨쉬기 시작한 토대는 바로 조선 시대 소통의 장이었던 장시였던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impact of early Jae Jung Won’s works to the Korean society in early Korean mission era. Because Jae Jung Won founded by Korean government and American missionary. Allen was a first Western mordern hospital in Korea. Medical works had significant meanings on the Korean mission. Mordern medical works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 included the spirit of Christianity which was a mental ground of Western civilization and medicine. Because Korean government did not permit the freedom of Christian mission except medicine and education in early Korean mission era, Jae Jung Won had important role of Christian mission at that time. In fact, through the Western medical cure of Allen for Young-ik Min, a high official in the government in 1884, Korean government felt kindly toward American missionaries and Western medicine.
There are several meanings of the early Jae Jung Won’s works from the missionary point of view. First, due to the role of Jae Jung Won, images of Protestant in Korea get better. And the influence of Protestant became larger as time goes by. Secondly, Jae Jung Won had a role of ecumeical works through the cooperation of denominations and missionaries for Korean mission. Thirdly, foreign missionaries through activities of Jae Jung Won performed their functions most effectively at that time. Taking care of patients itself was to be a mission, and to introduce Christian love to the Koreans. Fourthly, another meaning of early Jae Jung Won’s works to the Korean society was to educate Christian talents to the Korean youth through the education of medicine. Fifthly, Jae Jung Won’s works in early era to the Korean society was to the gate of civilization for the Koreans like campaigns for enlightenment and hygiene.
Therefore Western mordern medical works with the center of Jae Jung Won from 1880’s to 1890’s were effective mission i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