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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3

        1.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예(禮)에 있어서는 엣 경전에 따른 고례(古禮)를 중시하였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하, 은, 주 삼대(三代)의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글씨 또 한 삼대(三代)의 고문을 추구한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였다. 시대적으로는 양난(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혼란과 사색 당쟁 의 격변 속에서, 요순시대를 정치현실에 재현하고자 하는 유토 피아적 인물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유학의 해석에 있어서 정주 (程朱)의 해석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점을 삼대의 문물과 제도 에서 해결점을 찾고자 하여,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라는 남인실학파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예사적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 이상과 사상적 학문 연구의 결과가 미전체라는 창신적 서체개발의 형성과정을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전서를 통해 그가 끝내 이루고자 했던 삼대시대의 치도(治道)를, 문자, 서법을 통한 재현이었다. . 1660년 그가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 부임(1660)되었을 때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미전체의 대표적 묵적이다. 한편 미전체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낭선군 이우를 통해 접한 청(淸)의 묵적「형산신우비」가 위작의 논란을 겪음으로, 허목 의 미전체에 관한 평가도 엇갈리는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문제는 후학들이 계속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체의 창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점이다. 그런 의 미에서 논문 말미에 발표한 심일종 연구가의 소장 자료「과두 전(蝌蚪篆)」이 삼척지방에서 발견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성 과이다. 미전체가 허목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엽적 인 한계를 넘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서체(미전체)의 학습 과 계승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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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허목許穆(1595(선조 28)∼1682(숙종 8)은 본관이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등이고, 호는 미수眉叟〮.태령노인台嶺老人이 다. 허목은 당시 보기 드문 개성적인 자가풍의 전서를 활용해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후인들이 그의 이런 전서를 두고 ‘미 전眉篆’이라고 칭하였으며, 전서로는 ‘동방제일’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의 학문은 고학古學이고, 문장은 고문古文이며, 서예 는 고서古書라고 할 수 있다. 허목은 삼대치도三代治道의 이상향을 미전眉篆으로 표현하였 고, 삼대三代를 동경하며 그 때와 같은 태평성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특히 자신이 만든 미전眉篆을 고집한 이유도 여기 에 있었다. 그러나 당색에 따라 그의 전서를 위전僞篆으로 폄 하하기도 하고,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북지역 에 산재되어 있는 허목의 전서현판은 빼어난 조형성과 역사성 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예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지금까지 상세히 연구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경상북도에 산재되어 있는 허목의 미전 으로 걸린 현판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서예사 자료보강에 일조하 고 ‘미전眉篆’의 예술적 가치를 되짚어 보는데 의미를 두었다. 허목의 경북지역 전서를 다루기에 앞서 우선 허목의 생애와 학 통을 검토하였다. 왜냐하면 삶과 학통은 한 사람의 학문성향과 예술환경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강 정구와 퇴계에 이르는 학통에 따라 경북지역 성리학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그 들의 서원이나 별당 혹은 사랑채에 허목의 미전이 걸리게 되었 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아울러 당색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었던 17세기 시대환경에 따라 동색同色의 선비들의 거소居所에 다수 의 미전이 걸렸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경북지 역 명가들의 서원, 사랑채, 별당에 걸린 허목의 전서현판의 내 용과 예술적 격조를 살펴봄으로써 그 동안 가려졌던 그의 예술 적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봉화의 충재 권벌의 별당에 걸린 <청암수석>현판은 미수의 절필작絶筆作으로 밝혀졌고, 미전의 최종예술성을 지닌 작품으 로 천진한 품격을 보여주어 주목되었다. 영천의 완귀 안증의 정자인 완귀정에 걸린 <완귀정>현판은 주변의 정경과 어울리 게 문자의 편방을 재구성하였고, 각 문자에 맞으면서 전체 장 법을 고려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 룡의 종택에 걸린 <충효당>현판은 이 건물의 당호이며, 서애 의 유시遺詩[후세에 전하다]에서 강조한 충忠자와 효孝자를 넣 어서 만든 현판이다. 충과 효를 강조한 내용을 살리면서도 경 직되지 않고 변화를 모색한 필획미를 느낄 수 있다, 성주의 회 연서원은 미수의 스승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스승을 대하듯이 운필에서 멋과 변화를 줄여 절제되고 정제된 분위기 를 드러낸다. <옥설헌>현판의 옥[귀하게 여김]玉자에 좌우로 길게 드리워진 대칭획이 일품이며, 장법에 있어서도 안정과 대 칭을 중시한 점이 살펴진다. 이와 같이 미전眉篆이 유독 많이 남아있는 경북지역 허목의 전서현판을 통해 한국서예사의 자료발굴에 일조하고, 미전眉篆 의 예술성에 대해서도 접근해 보았다. 아울러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통해 한국서예의 새로운 면모를 개척한 허목에 대한 재 평가와 후속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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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여러 해석이 난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칭과 위치 및 성격 등을 둘러싸고 여러 이설이 존재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척주동해비를 재앙을 막는 부적(符籍)처럼 간주하기도 하고 혹자는 축문(祝文)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비문(碑文)에 기술된 여러 해외의 이국 풍속에 대해 하 나하나 고증을 하면서 아울러 동해송의 문체를 분석해서 그 내용을 검증하고 이를 토대로 척주동해비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결론적으로 허목은 동해바다를 신비화하거나 주술적인 기원을 하려 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동해송’(東海頌)이란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 이 동해바다의 아름다움과 덕을 찬탄하고자 한 시문을 써서 비석으로 세운 것이 동해척주비이다. 이 동해송은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서 존 경감을 가지고 읽혀지고 연구되었던 명문장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의 독특한 서체(書體)와 이국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척주동해비 가 재앙을 막아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글로 신비화되었다고 본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척주동해비는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유명해서 그 내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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