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0-479년)을 시작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년) 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그리스의 전장에 세워진 트로파이온에는 고전기 그리스인들의 전쟁과 승리에 대한 관념이 담겨있다. 그리스의 초기 트로파이온은 전장에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직후에 세워진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세움으로써 승자는 신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미래의 전투에 대한 승리를 담보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이것은 전우들과 승리의 기억을 공유하고, 적군에게는 패배를 시각적으로 각인시킴으로써 그들의 잠재적인 도발의 의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마지막 전략이기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기원전 5세기의 도기들과 아테나 니케 신전의 난간을 장식한 부조는 그러한 전술의 기록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료이다. 특히 5세기 평양지역 고분벽화는 4세기 이래로 지속된 漢系와 낙랑 고분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평양천도 이후에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벽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본 논문에서 옥도리 벽화고분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5세기 전 반~중반 평양지역에서 이루어진 집안지역 문화의 수용과 융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옥도리 벽화고분이 조성된 5세기 고구려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427년에 단행된 평양천도에 주목하였다. 수도 천도로 인해 평양은 이제 고구려의 새로운 정치적․문화 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존 국내성의 집안 문화가 새로운 수도 평양으로 유입되며 평양에서 汎고구려적인 새로운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5세기의 고분 문화에서도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교류․융합되는 과정을 거쳐 汎고구려의 문화가 성립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구조상 감실이 달린 二室墓의 구조로 평양지역 벽화고분 고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분의 구조나 생활풍속·사신의 벽화 주제와 구성은 평양과 집안 지역의 고분들과 친연성을 보여 그 제작시기를 5세기 전반∼중반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감이 달린 이실묘의 독특한 구조와 생활풍속·사신·장식문 등 다채로운 벽화 내용과 구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또한 옥도리 벽화고분에 나타나는 집안과 평양지역 고분문화의 특징들은 고구려의 평양지역 지배 및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문화적 교류를 보여준다. 그러나 옥도리 벽화고분은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공존할 뿐 아직 서로 융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양상으로 두 지역 의 문화교류 초기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옥도리 벽화고분을 통해 5세기 전반~중 반에 이루어졌을 두 지역 간의 교류를 통한 고분문화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옥도리 벽화고분은 5세기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와 汎고구려 문화의 탄생을 이해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A few archeological excavation of Buddhist temple sites of Koguryo were reported with information of site arrangement. The interpretation of such information is very important not only for the explanation of Korea early Buddhist architecture but also for the development of East Asian cases in general since no archeological evidences of the same period were found in other countries such as China. Though the investigation of the four temple sites this paper attempt to identify their date of construction and the process of change. The study depended much on comparative studies of the change of site elements such as pagoda, image hall., corridor, and other buildings. The study could conclude that the site of SangO-Ri must be the earliest case which was followed by ChungRung-Sa, which was built in around 427AD. The site of ToSung-Ri was the case which was the work of the rate 5th century. Such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Buddhist architecture in Koguryo unveils the fact that the process of change was a continuous flow toward a consistent goal of change that had much to do with the contemporary religious situation.
본 연구논문의 목적은 요안네스 카시아누스의 『제도집』과 『담화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철저하고 자발적인 부의 포기와 가난의 지속’이라는 주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반복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다. 카시아누스는 5세기 초 남부 갈리아 지역에서 수도사로 활동했고 『제 도집』과 『담화집』을 수도문헌으로 남겼다. 두 권의 수도문헌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동방의 수도생활을 서방, 특별히 갈리아 지역의 수도사들에게 전 할 목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카시아누스의 수도문헌에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주제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카시아누스 연구가들은 그동안 가난의 주제 뿐 아니라 그것이 강조 되는 이유와 배경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연구논문은 카시아누스의 가난에 대한 강조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제도집』과 『담화집』에서 가난에 대한 강조가 어떻게 나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