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독도교육의 변화를 살펴보고 독도교육 내용체계가 독도 학습에 중요한 교구인 경상북도교육청 『독도』와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바로알기』 교재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초등학교 독도교육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향후 적절한 수준에 맞춰 흥미롭고 심도있는 독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모색해보았다. 독도교육 내용체계의 10가지 분류 항목은 위치, 영역, 지형, 기후, 생태, 자원, 지명의 변천, 독도수호자료,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대응, 영토주권수호노력이다. 그러나 경상북도 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의 교재에서 다루고 있는 분류 항목을 살펴보면, 10개의 분류 항목에 대한 내용을 모두 기술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연속적인 독도교육에서 저학년과 고학년에서 각 각 다루어져야 할 분류 항목의 분량과 난이도가 적절하게 구분되거나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초·중·고등학교로 구분하여 제시한 내용요소를 무 시하고 중·고등학교에서 다루어야할 내용요소가 초등학교에서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교육부의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반영한 독도교육 내용체계를 통해 일선 학교에서 독도교육을 강화하고, 그에 따른 세부 시행계획들을 비교적 잘 추진해오고 있다. 특히 학생활동 중심 교육이 강화됨에 따라 체험·활동 중심의 다양한 학습 기회가 보장될 수 있도록 독도교육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교재의 내용은 초등학교 수준에 맞게 기술하고 이와 함께 독도의 자연, 사료, 동·식물 등의 스티커 붙이기, 독도십 자말풀기, 독도보드게임, 독도책갈피 만들기 등 독도관련 체험·활동을 돕는 학생 참여 중심의 독도교재 개발도 요구된다.
일본의 독도정책은 정치 행위로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제도화 된 법규 혹은 규범보다 정치적 가치에 따라 단순한 반대를 표하는 것으로 권리보전을 위한 소극적인 행위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이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정책 시책들을 ‘고유영토 주장’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사료와 자료를 찾아내는 것을 넘어서 영유권 주장을 위한 공세적 논리로 ‘다케시마의 날’ 행사의 정치화,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관제화, 독도 영토교육의 확산화 등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러한 특징들은 정부 주도의 해양정책에 예속된 독도정책, 우경화된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구성원, 노골적으로 편향된 독도교육의 강화 등과 같은 딜레마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일방적 선언에 적용되는 지도원칙으로 항의한 영토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현존하는 상황이 고착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항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1952년한국 정부의 평화선 선언 이래본격적으로 제기된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의독도주권수호정책의전개과정을1965년한일어업협정체제와일본정부의 일방적 파기 및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 체제로 구분하여 고찰한 다음 일본의 궁극적인 전략인 ICJ를 비롯한 국제재판소 제소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유엔해양법협약상 강제관할 배제선언의 국제법적 효력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한국의 독도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일본이 제기하는 영유권 주장의 본질적 토대는 제국주의 침략 노선의 근간인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의 독도주권을 인정한 1696년에도막부의도해금지령과이를승계한1877년 메이지 정부의「태정관지령」에대한의도적인은폐에 더하여, 1905년무주지선점론에서시작하여, 17세기고유영토론을경유한뒤, 1951년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승인론으로 전환해온 과정 자체가 일본이 강변해온 국제법상 시제법의 법리에서도 오류로 점철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한계로인해일본의3단계장기전략정책프레임은한국의외환위기국면을활용한한일어업협정의일방적 파기와병행하여 본원적·역사적·조약적권원으로 귀결되는 국제법적논거의 강화를통해궁극적으로ICJ를비롯한국제재판소에회부하려는고도화된전략으로분석된다. 이에우리정부는일본정부가일제식민주의에입각하여제기했던1954년ICJ 제소시도선례에서이미확고한 독도주권 수호 의지를 천명하였는 바, 향후 이를 제고하는 장기・종합・체계적 정책 대응방안의 수립이 긴요하다고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외무성은 SCAPIN 677에 의해 일본의 영역에서 분리된 일본 주변 섬들을 되찾기 위해 이들에 관한 영토조서 4권을 1947년까지 작성해 미국에 제출하였다. 이 중에 독도(다케시마)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영토조서 제출 후 독도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독도는 류큐 등에 비해 중요도가 각별히 낮음으로 거의 무시되었다.
1951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는 규정되지 않았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시마네현의 호소를 계기로 외무성은 독도 연구를 시작하였다. 또한 한국이 1952년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독도를 그 안에 넣자 외무성은 독도 영유권의 공고화에 나섰다. 그 하나가 미·일 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 연습장에 지정하는 것이었다. 이 지정에 인해 한국 어민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1953년 5월에 지정이 해제되었다.
해제를 계기로 독도로 항행한 시마네마루가 한국인의 어로를 발견하자 일본정부는 「다케시마 대책 요강」을 결정하였다. 이 목적은 독도를 경찰력으로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횡포에 한국 측은 분노해 일본 순시선에 총격을 가했는데, 오히려 외무성은 한국정부에 사건을 항의하고 영유권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외무성은 「한국정부견해1」을 받자 영유권 논쟁만 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로 제소하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해 다시 일본 순시선이 총격을 당하자 일본정부는 ICJ 제소를 한국정부에 제안하였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를 거부해 재판은 성립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하려고 여러 방도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나머지 방도는 한일회담에서 쟁점화 하는 것이었다.
울릉도는 개항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불법 입도하여 거주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도 이를 방조하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철환을 위해 두 차례나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실행하고 일본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내부 조사관 우용정(禹用鼎), 부산 해관 세무사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와 일본인 관리 주 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 아카츠카(赤塚正助)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에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종래 강원도 울진현에 속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이번에는 독립시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울도군”으로, 격상시키고, 울도군의 관할지역을 울릉도와 죽도(죽서도)와 석도(石島, 獨島)로 법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관제 개정 사실을 중앙정부의 관보 1900년 10월 27일 자에 국제고시하였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국제고시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石島, 獨島)의 대한제국 영유가 서양국제법으로도 다시 한번 더 세계에 공포된 것이다. 물론 이 때에 일본측은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이 때 독도를 종래의 명칭 ‘우산도’로 호칭하지 않고 “石島(독도, 獨島)”로 표기한 것은 공도정책이 폐지되어 1883년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온 울릉도민들이 사투리로 돌(Rock, Stone)을 “독”이라고 발음하여 독도를 돌섬(Rock islet)이라는 뜻의 지방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돌섬”은 뜻을 취하면 “石島”가 되고 음을 취하면 한자로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는데, 뜻을 취해 “石島”로 표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때 국제법에 밝았던 조사단의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는 독도의 “Liancourt Rocks”라는 서양 호칭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도 “리앙쿠르 石島”가 되므로 겸하여 石島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행한 『일·지·한 항로이정일람도(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우산도”를 “리앙꼬르드石”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제국의 石島표기는 리앙쿠르 石島(Liancourt Rocks)가 바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국제법을 빌려다 거듭 밝힌 것이었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독도에 일본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려고 계획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가 주장한 것은 독도가 임자없는 無主地라고 주장해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有主地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 정부의 독도영토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로서 1905년 1월 이전에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에, 1905년 독도를 일부러 “무주지”로 억지 전제한 일본의 독도침탈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효”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침탈 사실을 중앙 『관보』에 고시하지도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은 국제법상 불법의 도탈(盜奪)을 시도한 것이고 완전히 무효인 것이다. 한국은 1910년에는 일제의 강점으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패망 후에야 한반도와 함께 회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에서 나온 다케시마문제에 관한 조 사연구 최종보고서(2007.3)와 일본 외무성의 「竹島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2008.3.8) 팸플릿의 경우 독도영 유권에 대해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내세우고 있다. 본고는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 위해 공도정책이란 용어 대신에 수토정책이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함께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불식하기 위해 향후 수토정책에서 어떤 논리를 보강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 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는 울릉도로 건너갈 때의 정박 장이나 어채지로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독도의 영유 권을 확립했고, 17세기말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지만, 독도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일 양쪽의 자료에서 일본 어부들이 전적으로 독도를 목표로 하여 어로활동을 했다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도에서의 어 로활동은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어부들은‘독도’만을 대상으로 해서 항해하지 않았다. 안용복 사건이후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온 사람들은 국제법 위반자들이었다. 그들은 1883 년 개척령에 의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882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들어가 살았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독도에까지 어로활동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굴하여야 한다. 수토정책의 경우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정책을 부각시켜야 하고, 그것을 공도정책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수토정책 의 대상에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었음을 드러내주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 가운데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았다는 자료는 제시되고 있지만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한 자료, 그리고 수토관이 독도를 심찰한 자료는 아직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료 발굴에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