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시대는 한국 서예의 시작점이다. 그 중에 고구려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비교적 일찍 한자문화를 받아들이고, 민족의 심미관을 융합해 자신만의 풍격을 갖춘 서예를 형성하였다.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국으로서, ‘지역 문화 거점’ 역할을 하여서 신 라ㆍ백제ㆍ일본의 서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 서풍이 여전히 통일신라시대와 일본에 부분적으로 지속되었 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귀족과 그 자손들은 여전히 ‘구양순체(歐陽詢 體)’를 숭상하였는데, 유민 묘지명에 대부분 구양순체의 풍격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서예의 대외교섭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서예 대외교섭의 시 발점이며, 한국서예 연구의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삼아 한국서예의 대외교섭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람이 될 것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한국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 가운데 ‘평화의 땅’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과 강서대묘에서 나타나는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재해석하여 공연한 부분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 시대 ‘옛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약 3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으며 벽화의 내용, 구성 방식, 표현 기법에서 고구려인의 기질과 그들의 기상 그리고 많은 문화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내용으로 하여 재해석한 공연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내었다. 본 연구는 고구려 고분의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인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공연에서 현대적으로 재현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비교하여 논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와 표현을 알아보고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의 주된 표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 가운데 ‘평화의 땅’에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가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그 표현들을 논하였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