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일재 정홍채(逸齋鄭泓采, 1901~1982)를 중심으로 20세기 한국 성리학의 현실적 함축을 검토하고, 21세기 유학이 무엇을 넘어서 야 하는지를 전망해 보려는 것이다. 한때 조선에서 성리학이 가졌던 절대성은 삶 전반을 통제하는 규범적인 것이었지만, 서세동점의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각한 사상적 도전에 직면했다. 정홍채는 20세기 일본의 식민 지배 에 이어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고,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으로 자본주의 선진 국의 반열에 오르는 대한민국을 목격하면서 유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20 세기, 유학의 주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도 정홍채가 견지했던 성리학은 ‘자족적(自足的)’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정홍채가 사용하는 「리(理)는 본질/기(氣)는 리를 훼손시키는 것」, 「성(性)은 도덕적 본질」, 「성[리]은 최선의 표준」, 「본질 순응은 최선의 이익」 등의 리 중심 은유들은 성리학이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임을 함축한다. 20세기 한국 성리학의 절대주의적 도덕 원리 의 강조는 불굴의 선비정신을 유지하는 원천이었지만, 다수의 프레임(frame)과 다수의 도덕적 귀결이 존재하는 21세기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론적 유폐’는 피할 수 없는 귀결로 보인다.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포기하는 것이 마치 유학 을 폐기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극단적 착시일 뿐이다. 우리는 유학의 시 조인 공자의 언설을 통해 인의예지의 덕목들이 획일적으로 규정되는 덕목이 아니라, 좀 더 큰 프레임이나 도식 속에서 그 의미를 얻는 것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공자의 도덕 이론은 21세기 탈형이상학적 흐름 안에서 경험적 정당화에 기반한 유학적 가치들의 현대화에, 나아가 ‘닫힌 철학’에서 ‘열린 철 학’으로의 전환에 유효한 시각을 제공한다.
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본고는 내암집 간행의 준비 단계에서 이루어진 여러 종류의 필사본과 기타 고문서들에 주목하여, 선조 시기 정인홍의 정치적 동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오늘날 정인홍은 주로 광해군 시기의 權臣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 치적 생애의 대부분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정인홍은 문과에 응시하 지 않고 유일로서 발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조시기에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당시까지 문과 출신자가 아닌 경우로는 전례가 없었던 현달한 관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선조 시기에는 그를 뒷받침해 줄 뚜렷한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신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의 배경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이었 으며, 임란 시기의 의병활동이 보여준 애국심이었다. 그가 한사코 관직을 사퇴하고서 ‘山野의 신하’로 남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도 당쟁 시대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아가 포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에 의거하여 사직소나 사은소 등의 형 태로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산림 정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군주가 인물의 선악을 옳게 판단하여 군자 의 당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그들에게 핵심적인 권력을 맡겨서 소인의 당이 조정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당쟁 시대에 처한 정인홍의 일관된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가 선조시기에 이미 많은 정적들을 만든 것도 이러한 비 타협적인 정치노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