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중국 사찰 채화의 시대별 전개 양상, 독자성과 보편성 등을 파악 하며 한국과 중국의 단청과 채화를 비교・분석한 것이다. 중국 채화는 송대에 편찬된 『영조법식(營造法式)』에 의해 정형화되었고, 명・청대는 채화의 전성기 를 이루었다. 고려시대 단청은 중국과 차별화된 이른바 한국적인 특색을 나타 내었고, 조선시대에는 명・청과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으로 교류하면서 사찰 단청의 형식과 문양 등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띠게 되었다. 명・청 사찰 채화와 조선시대 사찰 단청의 머리초[조두], 금문(錦紋), 별지화[잡화], 단독문 등을 통해 공통점과 독자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다. 머리초・금문・단독문은 한 부재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도안화된 장식문이고, 별지화는 부재별로 다양한 도상이 사용된 회화적 장식화이다. 한국 단청과 중국 채화의 유사한 문양 가운 데 네 종류를 선별해 조선시대 단청과 명・청대 채화를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양국 단청[채화]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국가별 독자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how late Joseon art scene interpreted and reflected the concept of “The four masters of Yuan dynasty (元四大家, from this out I’ll mark it as a Yuan-sadaega)” into landscape paintings during the late 18th to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is study employs a comparative approach, analyzing paintings created during this period in Korea and China, particularly those featuring Yuan-sadaega, while also investigating written records. The understanding of the Yuan-sadaega and their paintings began through the early 17th century Gosi's painting manuals(顧氏畵譜). Through Heo Guseo (許九敍)'s works and literary records, It can be observed that the perception of Yuan sadaega's artworks and artistic aspects during at least the late 18th century was established within the art community. Notably, a distinct shift in the understanding of painters and the composition of Yuan-sadaega is observed in the trends of the late 18th and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use of dwelling in the mountain(山居) image into landscapes in Yuan-sadaega compositions is evident, particularly in works by artists like Won Myeong-ung(元命雄) and Jeong Su-yeong(鄭遂榮). This trend is rooted in the contemporaneous significance of the art scene that produced a variety of paintings with the theme of ‘benevolence and daily life and in the shared understanding of the Yuan-sadaega as recluse(隱士) within the artistic community. This collective perception of the Yuan-sadaega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influx of theories and writings on painting by Dong qi chang(董其昌) and by the circulation of painting manuals. The early 19th century, a new a new type of painting emerged alongside Bangjak(倣作, paintings of creative imitation) about the Yuan-sadaega, known as ‘Bangjak about Yuan dynasty painters(倣元人山水圖). Through the works of Kim Jeong-hee(金正喜) and Heo Ryeon(許鍊), it is noteworthy that various scenes are depicted under the same theme. This reflects the establishment of universal values and standards for literary painting within the art community. This process led to the term ‘Ni-hwang(倪黃, abbreviation of Ni zan and Hwang gong wang)’ emerging and the concept expanding under the term ‘Yuan-in’ (元人, the symbol of Yuan art scean). As a result, the desired artistic style pursued by the contemporary artistic community was encompassed under the universal concept of ‘Yuan-in,’ and ‘Bangjak about Yuan dynasty painters’ came to embody this comprehensive theme
본 연구는 조선 후기 풍속도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전문 유랑 연희패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남사당놀이 여섯 종목 형 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연구 방법은 문헌 연구를 중심 으로 이루어졌으며,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산풍속도>에서 꼭두각시놀음은 ‘박첨지 놀음’과 ‘산대패 노는 모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꼭두는 후뇌를, 각 시는 어린 소녀를 의미한다. 남사당놀이에서는 꼭두각시놀음을 ‘덜미’라고 부르는데, 인형의 목 뒷덜미(후뇌)를 잡고 공연하는 특징이 반영된 용어이다. 둘째, 〈봉사도〉와 〈알성시은영연도〉에는 ‘땅재주’와 ‘대접 돌리기’가 한 무대에서 동시에 공연되는 모습이 담겨있다. 즉, 이 연희들은 민간 부분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요 행사에서 공 연되는 놀이로 대중들의 인기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놀 이에서 ‘땅재주’는 ‘살판’으로, ‘대접 돌리기’는 ‘버나’로 명칭 된 다. 셋째, 줄타기는 연희 전에 고사를 지내는 특징이 있다. <기 산풍속도>에서 줄꾼은 창배(倡俳) 혹은 창부(倡夫)로 기록되어 있다. 남사당놀이 줄타기는 줄꾼이 여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남 사당놀이에서는 줄타기를 ‘어름’이라고 한다. ‘줄-어름’이란 단 어에서 ‘줄’이 생략된 형태로, ‘어름’이란 ‘(줄을) 탄다’는 ‘보삭 (步索)’의 의미이다. 넷째, <기산풍속도>에는 ‘탈놀이’의 전체적인 연희 분위기와 각 탈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도상이 존재한다. ‘탈놀 이’는 야간에 공연되는 특징이 있다. 남사당놀이에서는 ‘탈놀이’ 를 ‘덧뵈기’라고 부르고 있으나, 1960년대는 ‘덧보기’로 지칭되어 있으며, 해학적이고 사회 풍자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째, 풍물놀이는 농악과 관련 있는 부분이다. 조선 시대 ‘사당’은 여성, ‘거사’는 남성을 의미한다. <기산풍속도>의 화제를 통해서 보면, 사당패는 여성 중심의 연희패였으며, 이후 남 성 중심 연희패가 생기면서 남사당패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 다. 또한, 풍물 연희 중에 하나로 펼쳐지는 ‘무동놀이’의 '무동' 의 의미는 어깨 위에 올라가서 연희를 하는 ‘무등’의 의미로 사 용되었다. 즉,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남사당놀이의 여 섯 종목은 다양한 19세기 유랑 연희집단이 해체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남사당놀이 여섯 종목 형성 에 미친 조선 후기 다양한 연희패들의 영향력을 분석한 것으 로, 남사당놀이 여섯 종목의 의미 분석 및 복원을 위한 기초자 료로 활용되는 데 의의가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의 주요 특징으로는 기법과 수법의 상위개념으로서 ‘화법’ 개념의 정립, 색채의 주관적 인식(일반성)과 객관적 지각(개별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제 색(본색)’ 개념의 부상, 예술적 형상화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적 필치’ 개념에 대한 강조 등 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재, 또는 갈등의 봉합을 추구했다. 그들은 ‘화법’, ‘제색(본색)’, ‘예술적 필치’ 등을 내세워 선과 색, 본색과 반사색, 몰골법과 구륵법 등 대립으로 이끌어지기 쉬운 것들을 담론 체계 안에 효율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화의 개조발전과 현대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렇듯 조율과 중재, 봉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개념들은 차이들, 곧 서로 다른 입장들이 경쟁하 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장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구축된 조선화 형식체계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조선화 창작과 수용에 절대적인 영 향력을 행사했다. ‘화법’, ‘제색’, ‘필치’ 등의 개념들은 모두 조선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의 능동적 관여를 강조했지만 그 관여는 언제나 지배체제의 이념이 정해준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조선화 형식론은 궁극적으로 형식 문제를 이념 문제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태평성시도>에 나타난 간판디자인의 조형성에 대한 연구이다. 한국간판문화의 형성은 개항 기에서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에 주로 영향 받은 것으로 보여 지며, 간판이라는 단어가 우리 문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907년 대한학회월보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도 간판에 대한 크기나 색상 등 조형적 문제를 이슈로 다루 었던 기사가 나타난다. 이 당시 시작되었던 간판의 크기나 지나친 표현 등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사회적문제로 지속되고 있 는 사안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본 연구는 전통기의 간판 사용과 그 조형성을 살펴보고 특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연 구대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태평성시도>를 선택하였다. <태평성시도>는 성시의 여러 생활상 을 담고 있는 일종의 풍속화로 당시의 상업시설과 상행위를 중심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간판으로 불리어지는 초패와 등간이 나타나는데, 초패란 나무판에 글자를 쓴 것이고, 등간은 상품이나 업종을 형상화한 상징물을 장대에 걸어 놓은 것이다. 연구방법과 연구기준은 <태평성시도>에 나타나는 초패 총63개, 등간(燈竿) 총285개를 대상으로 구조, 형태, 색상, 내용, 서체를 중심으로 조형성을 분석하였다. 초패의 크기측정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양동민속마의 ‘대성헌’을 잣 대로 하였다. <태평성시도>에 나타난 간판디자인의 조형성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형태적 측면에서는 건축물에 적용되는 면적이 작아 간판이 건축물의 원형미에 최소한의 범위에서 개입하고 있다. 2. 언어적 측면에서는 상호나 상품에 대한 직접적 표현보다는 유교적 의미에 부합하는 글귀로 대신해 언어적 품위를 보이고 있다. 3. 수량적 측면에서는 좌우 두 개만 설치되어 있어 건물과 균형적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4. 윤리적 측면에서는 초패로 인한 교통 불편을 최소화 해 상반상생의 디자인윤리의식이 드러나 있다. 5. 색상에서는 시각적 혼란이나 자극적 색상을 줄이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 적 안정감을 주고 있다. <태평성시도>에 나타나는 간판디자인은 현대사회의 간판디자인과 조형의식에 한국적 간판의 원형 적 가치가 담긴 유용한 사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향후 조선시대 간판 연구를 위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다 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