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윤석열 신정부가 출범하고 한일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신정부는 대일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만, 한일관계의 개선은 역사 적 연원에서 양국의 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일 간 문제의 핵심 쟁 점인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서 유발된 ‘한일무역 분쟁’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효력 종료 결정으로 양국은 마찰을 빚어 왔다. 이에 역사·경제·안보 등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면서 한일관계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무역·안 보 등에서 양국의 협력이 이루어지더라도 민감한 과거사 문제와 군사· 안보협력의 완전한 회복은 어렵다. 한일관계 개선은 단순히 양국의 문 제만은 아니며,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 영향을 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일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것보다 우선 양국이 미래 발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국내 진보와 보수의 의견을 통합하고 국민적 동의가 이뤄질 때 비로소 화해·협력이 가능하다. 지금 의 국제관계는 국가 간 상호의존도가 매우 높으며, 과거보다 훨씬 복잡 하게 얽혀있다. 따라서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안보위기의 국제관계를 잘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동북아에서 균형 있는 중립외교로 한 일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 강국들과의 관계발전에서 독 립성과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hort essay is to mitigate harsh debate about ‘comfort women.’ Although it is not expected to be resolved in the foreseeable future, understanding the structure of the problem based on the fact-finding and legal analysis would enable the two peoples to seek a better solution. The author claims that: (1) although some of the historical facts remain unclear, and some people tend to focus too much attention on fact-finding, from the viewpoint of international law, sufficient evidence has been revealed to confirm Japan’s responsibility for its conduct in the Second World War, and Japan does not and should not deny the relevant historical facts; (2) Japan was absolved of its responsibility by the 1965 Agreement in a legal sense; and (3) having said that, this case reveals the limits of the positivistic legal approach, and the Asian Women’s Fund can be one legitimate way of dealing with this problem.
Food goods traded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middle period of the Cho Sun era included Insam (Jinseng), rice, beans, honey, perilla oil, starch, adlay, walnuts, pine nuts, jujubes, hazelnuts, and dired chestnuts as exports ; and pepper as imports. The number of Japanese envoies that visited regularly was one thousand five hundred people a year. The receptions that were held for them during the middle period equaled those of the first term of the Cho Sun era, but these receptions were only held in Pu-san. The expense of daily meals was broken down into 8 grades ranging from \129,300 to 2133. The daily meals included Jo-ban (breakfast), Jo-seok-ban (breakfast and dinner), and Ju-jeom-shim (lunch) for the Japanese who visited regularly. During the course of a year, the total amount spent on daily meals was put at a billion won. The banquet style meals included Ha-seon-da-rye (a welcome tea party), Ha-seon-yeon (a welcome banquet), No-cha-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the street), and Ye-dan-da-rye (a drink banquet that was held when silk was offered as a gift). It also included Byeol-yeon (a banquet out of the dordinary), Sang-seon-yeon (a farewell banquet), and Myong-il-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a national holiday). The banquet style meals were composed of Ceon-tack (to set a table for dinner), Sang-hwa (a flower that was put on the food), Kwan-hwa (to offer a flower when a banquet was held), Ju-9-jan (the ninth wine glass), Dae-seon (meat), music, and Jung-bae-rye (a banquet that was held again after a banquet). The Cho Sun government held banquets forty five times for the Japanese, the food expense for the banquets was put at two hundred and thirty million won.
Food goods traded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first term of the Cho Sun era included Omija (fruit of the Maximowiczia chinensis), Jat (pine nuts), Insam (Jinseng), rice, and beans as exports ; and pepper, sugar, and medicinal stuffs as imports. The trade between Korea and Japan was a result of Japanese envoies' visiting. The official number of Japanese envoies who had exchanges with Koreans were two thousand people a year. Once the Japanese entered Korea, they did not need to pay for their living expenses for the length of their visit because the Cho Sun government bore the whole expense. The Cho Sun government gave formal receptions to them, which included daily meals as well as banquet style meals. The daily meals included Jo-ban (breakfast), Jo-seok-ban (breakfast and dinner), and Ju-jeom-sim (lunch). Meals were served four times a day. The banquet style meals included Sam-p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in Sam-po), Kyong-joong-young-jeon-yeon (a farewell banquet, and a welcome banquet that was held in Seoul), Jyu-bong-bae (to offer a guest a drink by day), N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the street), Kwol-nae-yeon (a banquet that was held within the Royal Court). It also included Ye-j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in Ye-jo), and Myong-il-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a national holiday). The banquet style meals were composed of Ceon-tack (to set a table for dinner), Sang-hwa (a flower that was put on the food), Kwan-hwa (to offer a flower when a banquet was held), Ju-5-jan (the fifth wine glass), Dae-seon (meat), and music.
나가시마 히로키의 논문은 통감부 체제 하에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한 한국의 항의의 부존재가 일본의 독도 편입을 묵인 또는 승인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나가시마는 통감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실무적인 서류 왕래를 한일 간 외교의 ‘내정화’라 정의하 고, 외교의 내정화는 한일 정부 간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한국정부의 의사표출을 쉽게 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통감부체제라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지배체제 하에서의 연락 구조의 강화는 오히려 일본의 한국 ‘예속화’를 심화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통감부 통치의 본질이나 실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잘못된 판단이다. 설령 나가시마의 주장대로 한국의 항의의 부존재가 입증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일본의 독도편입의 정당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독도편입 사실을 인지한 1906년 5월 이후부터 한국의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는 1910년 8월까지의 약 4년여의 기간 동안 한국이 침묵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이 독도에 대해 새로운 권원을 설립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유권을 포기하거나 양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항의의 부존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4년여의 짧은 기간의 실효적 지배만으로는 새로운 권원을 확립하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견해이다.
이 글은 과거, 주로 식민지 시기의 한-일 연대 투쟁의 경험에 기반하여 앞으로의 한-일 민간 사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발전적인 가능성들을 모색해보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연대’는 무엇보다 어느 한 쪽의 ‘맹주론’, 즉 그 어떤 불평등한 전제조건들도 수반하지 않는, 한-일 양쪽 민중의 교류와 공동의 투쟁을 뜻한다. 따라서 묵시적으로나마 ‘일본맹주론’을 저변에 깔았던 구한말 시절의 일본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연대’를 가장한, 내지 표면적으로 ‘연대’의 기치를 내세운 제반 시도들을 여기에서 제외시키고, 아울러 한국 인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는 식민지 시기의 각종 부일(附日)협력 행위들과 엄격히 구분시키 려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와 의 경계선에 선) 자유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내지 무정부주의자 등 일본제 국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한 만큼 또 하나의 저항주체인 조선민족과 평등한 동지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그나마 보였던 부류들이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었던 매우 급진적인 – 거의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운 - 자유주의자로 법조인 야마자키 게사야와 같은 양심 인사들을 언급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일본인 반체제 투사들과 함께) 조선 및 대만의 반체제 투사들을 변론해준 후세 다쓰지는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마찬가지로 1920년대 반(反)식민지 문학의 창시자인 나카니시 이노스케도 – 비록 전후에 공산 당에 입당했지만 – 그 당시로서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 을 치르면서 조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억압적 체제에 같이 맞섰던 이들은 바로 학계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나 가장 선진적인 대기업들에서 (이소가야 스에지) 공산주의적 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이었다. 일본 ‘내지’와 중국에서 한-중-일 무정부주의자들의 연대투쟁도 1920년대 초반부터 꽃피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들의 의미를 높이 사는 동시에, 그 한계도 지적해야 한다. ‘평등한 공통투쟁’이라 해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길러낸 아비 투스가 그대로 작동돼 일본 내 공산주의적 조직 안에서도 조선인들을 타자화시킨 일이라든가 일본 무산계급 작가들의 작품 (오구마 히데오, 장장추야)에서 조선을 여성화시켜 오리 엔탈리즘 논리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등 반체제 투사들도 체제의 논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일제의 패전 이후에는 무장투쟁 등 다양한 모색의 기간을 거친 일본공산당 은 1955년6월의 제6차 대회 이후에 체제내 편입의 길을 택함과 동시에 (일차적으로 일본 내의) 조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어버리고 말았고, 비슷한 시기에 북조선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국제주의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노선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해서 식민지 시기 한-일 연대 투쟁의 유산은 점차 역사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