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우의 영물시 「戱次人水陸菜品三十八絶」에는 서민들의 생활상, 物 象에 대한 逼眞한 묘사, 格物을 통한 性理의 이해가 나타나 있다. 「희차 인수륙채품삼십팔절」시에는 국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애잔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우리의 산과 들, 바다에서 자라는 식재료로 사용되는 식물들이 거짓 없는 진솔함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식용 식물을 통해서도 성리의 본질을 깨닫고자 노력한 성리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폭넓은 본초학의 상식으로 국토에 자생하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면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희차인수륙채품삼십팔절」에서 보여준 작시의 자세는 문학작품이 사회의 문화나 분위기를 알게 해주는 治世의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詩作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리고 만물을 대하여 그 속에서 명덕의 이치를 깨달아 성찰하고 日新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성리학자로의 모습이 시에 그대로 나타났다. 2,000여 수의 한시가 말해주듯 그는 시작을 꺼리지 않았으며, 물상에 대한 소회를 기발함으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기발하고 참신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발현된 詩心으로 내면에 온축된 物産에 대한 지식과 감화가 가감없이 형상화된 것이다. 시작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표현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였으니, 문학에 대한 그의 식견과 역량을 유추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글은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곽종석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國權恢復의 방안과 성격을 검토한 것이다.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조선이 당면한 국내·외의 시대적 과제를 감안한 토 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이 본격화한 국제 정세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는 조선의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국권이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內修를 통한 自强의 방안을 모색함과 동 시에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할 수 있는 외교력의 발휘를 주문했다. 이에 따 라 그는 서구사조의 적극적인 수용을 지향하는 開化의 입장에 동조하기를 거부 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자세로 물리력을 동원해 外勢의 배척을 요구하는 衛正斥邪의 논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제국주의 국 가들의 침탈에 따른 사상적 혼돈과 국가적 위기를 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대응 하되 유학의 현실적 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결국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국내·외의 시대적 상황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유학의 변화를 통한 內修를 토대로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한 외교 력을 발휘해 민족의 생존을 보장받는 기조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열강의 공관에 布告文을 보내 일본을 견제할 것을 촉구했을 뿐만 아 니라 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五賊의 처단을 주장했고, 파리강화 회의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조선의 독립의 당위를 알리기 위해 長書를 기 초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儒林團 대표로서 大同團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寒洲學派 의 ‘心卽理’說을 이념적 근간으로 정립한 分合論的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범주에서 벗어난 거시적 안목에서 다양한 사조를 포용적으로 수 용하는 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곽종석(1846-1919)은 조선이 멸망할 즈음에 살았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또한 애국지사였다. 곽종석은 사서오경에 대한 경학적 견해를 다양하게 남겨놓 았는데, 특히 그의 논어학은 주목할 만하다. 곽종석 논어학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주자학파의 주석 에 대한 정밀한 검토이며, 둘째는 경문의 독자적 해석, 셋째는 ‘心卽理’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 등이다. 곽종석 논어학의 이러한 세 층위는 그의 논어학이 가지는 특징인 동시에 조선논어학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특징인 주자학파의 주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조선주자학파 논어학의 보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문에 대한 독자적 이해와 심즉리 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퇴계학파의 경학적 전통안에서 충분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점이다. 퇴계는 주자 경학의 충실한 계승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경문을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곽종석의 스승인 이진상은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논어』 해석에서 이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곽종석의 독자적 경 문해석과 심즉리설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모두 그가 스승으로 삼은 퇴계와 이진상의 논어 해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곽종석의 논 어학을 조선주자학파, 더 좁게는 퇴계학파 논어학의 계승자적 지점에서 그 위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 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 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 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 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 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 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유교문 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한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 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 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 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 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 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 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 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받아 조선 말 최대의 학파라고 일 컬을 수 있는 한주학파를 선두에 서서 이끌면서 ‘개명한 도학자’로서 일생을 살 았다. 곧 그는 이진상의 竪看·橫看·到看의 三看法과 理發一途說, 心卽理說을 계 승하여 옹호하고, 이진상이야말로 공자와 맹자, 주자, 이황을 정통으로 계승하 였다고 주장하였다. 한주학파의 리발일도설과 심즉리설의 핵심은 심과 그 속에 있는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여 주체에 철학적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단순히 이론적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가까이로는 어려운 시 기 도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눈앞의 현실 을 인식하고 참여하는 데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한국유학사에서 면우 곽종석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 그리고 현실 대응 등 그의 삶과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게 살폈다. 곽종석은 조선 말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간재 전우와 함께 조선유학의 쌍벽으 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학통과 당색에서 완전히 초탈하지는 못했지만 일생을 융합주의 신념 아래 살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고 영 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넘나드는 등 보폭 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유림을 세력화 하고 대동단결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문 특성은 ‘집약’과 ‘會通’에 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한 뒤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체계화하였으며, 연구방법론 에서도 여타의 학자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곽종석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가교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개명적이고 시대 를 앞서가는 안목과 시대인식은 후학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은 철학․종교․교육․역사학 및 독립운동 여러 방면에서 큰 구실을 하였다. 유학사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전통의 근대적 계 승을 위해 신학(서구사조)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곽종석의 학문관, 학문 방법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고, 전통 학문의 근대적 계승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방향성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