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ffany & Co. had been recognized so highly in Korea even before its official advance to the country in 1991 that a successful jewelry company was called 'Korean Tiffany'.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plain how American brand Tiffany had been spread and recognized among Korean people by analyzing related articles and advertisements during the period from the Liberation to the 1989. The research method used in this study was the articles of newspapers and relevant literature. This is the result that, with the run of movie 'Breakfast at Tiffany's in Korea in 1962, the trade name and trademark of Tiffany were used illegally not only by jewelry traders but also by other businesses. Other luxury jewelry brands in the same period could not enjoy indirect advertising and spillover effects as good as Tiffany. As a result, a successful jewelry company was called 'Korean Tiffany' in 1989, and the expression is still valid in the country.
해방공간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이들은 큰 틀에서 우익진영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이었다. 이 세 사람은 귀국하면서 다같이 기독교인으로서 활동했고, 기독교를 중요한 정치적인 배경으로 생각했다.
이런 우익 3영수의 대열에서 제일 처음 이탈한 사람은 김규식이었다. 원래 중도파였던 김규식은 제 1차 미소공위 이후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라 중도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김규식를 우익의 지도 자라고 따르던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는 김규식의 노선을 이탈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촉성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48년 김구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반대하자 기독교인들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1948년 3월 이북인대회에서 김구는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익 기독교세력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우익 3영수가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반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을 지지하였다. 특별히 공산주의의 학정을 체험한 월남 기독교인들의 발언권이 센 기독교에서 김규식의 좌우합작 주장이나, 김구의 통일지상주의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결국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