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南冥學의 본질과 특색에 대해 재조명한 것이다. 南冥은 16세기 사화 기에 현실정치의 참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인데, 25세 때부터 孔子 를 배우고자 하여 顔回의 克己復5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는 구도의 길로 들어 섰다. 남명학의 淵源은 남명이 학문을 전환한 뒤 孔子·周敦頤·程Ⅱ·朱熹의 초상 을 그려 봉안해 놓고 참배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주자의 博文約5의 학문과 程明道의 揚休山立의 氣節과 周濂溪의 光風霽月의 흉금을 추구하고, 나 아가 안회의 克己復5를 통해 공자의 경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명학의 요체를 敬·義라 하는데, 이는 주역 「坤卦-文言」의 ‘敬以直內 義以 方外’에서 나온 것으로, 주자도 학문의 요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경의학의 연 원은 주자를 통해 주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의학은 마음을 眞實無妄하게 하는 공부로, 敬은 마음을 고요하고 또렷하게 하여 긴장감과 경건함을 유지하 는 것이고, 義는 마음이 발한 뒤 판단이나 조처를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하는 것 이다. 남명학의 본질은 남명이 남긴 3편의 賦와 學記類編의 「誠圖」·「易書學庸語 孟一道圖」·「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原泉 賦」에는 근본을 중시하는 사유가 근저에 깔려 있으며, 「民巖賦」는 나라의 근본 을 백성으로 보고 정치의 근본이 임금에게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며, 「軍法行酒 賦」는 나라의 근본은 禮義라는 점을 역설한 글이다. 또한 「誠圖」와 「易書學庸 語孟一道圖」는 남명학의 본체에 해당하는데, 「誠圖」는 眞實無妄의 誠을 목표로 그 공부방법과 실천요령을 적시한 도표이며, 「易書學庸語孟一道圖」는 惟精·惟 一의 공부를 통해 誠을 추구하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는 남명학의 작용에 해당하는데, 「心爲嚴師圖」는 心을 嚴師로 삼아 存養·省察을 나타낸 것이고, 「幾圖」는 省察과 克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것이 며, 「神明舍圖」는 극기복례하여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남명학의 특색은 「神明舍圖」의 ‘天德’과 ‘王道’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 덕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얻어 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內聖에 해당하 고, 王道는 그 덕을 현실사회에 펴는 것으로 外王에 해당한다. 천덕을 추구하는 것은 人道를 닦아 天道에 배합하는 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명학의 특색은 居 敬行義의 공부를 통해 中庸의 大旨인 誠을 추구한 데 있다. 이는 퇴계가 소 학·대학을 근본으로 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중용을 所依經傳으로 삼은 것이다.
이글은 남명학 관련 문헌의 번역 현황을 정리하고, 번역서의 체제와 내용을 검토하고서 향후의 과제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한 것이다.
남명의 저술 『남명집』 번역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명의 전문가가 오역을 바로잡고 윤문을 하여 수정판을 다시 간행해야 할 것이다. 『학기류편』 번역도 성리학에 이해가 깊은 전문가가 다시 검토하여 번역문의 미비점을 바로잡고,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판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직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남명집』 판본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하는 작업이 요구되며, 『남명집』 정본화사업 추진도 절실히 요구된다.
남명의 전기 자료 및 연원록 번역은 남명학연구소에서 상당한 성과물을 냈지만, 아직도 번역해야 할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후인들의 문집에 산견되는 남명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아 번역하는 일, 각 종 序·跋 및 남명 유적지 건축물의 기문·상량문 등을 모아 번역하는 일 등은 서둘러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남명 문인의 저술 번역은 약 10분의 1정도만 번역되었거나 번역 중에 있고, 그 나머지 문집은 번역이 불투명하다. 이런 문집은 분량이 매우 적어 국가기관에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중이나 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사업이 활발히 일어나길 기대한다. 또한 남명학파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남명 사숙인들의 문집도 모두 번역해야 남명학파의 실체를 구명하는 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학교와 문중이 모두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특히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남명학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학교 당국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및 문중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번역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연구기관에서 번역한 성과물은 교열과 윤문 등의 과정을 거쳐서 오역이나 비문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문중에서 단독으로 번역한 경우는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번역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재야 학자가 혼자 번역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하며, 연구기관에서 번역을 한 뒤 교열과 윤문을 거쳐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 논문은 우리나라 남명학 관련 연구기관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연구기관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우리나라 남명학 연구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 22주년을 기점으로 하는 글이니만큼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관련 연구기관을 살펴보고 또한 우리나라 유학 인물관련 연구소들의 설립과 활동 상황도 살펴보았다. 2001년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계기로 남명학 연구는 外延的으로 많은 확대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국제학술회의 등 다양한 학술 활동을 통해 연구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앞으로 남명학연구소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물을 기반으로 남명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역 거점대학인 경상대학교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남명학 연구기관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인력 양성과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개소 20주년을 맞아 남명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에 대해 시기별로 발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준으로 1990년 이전과 남명학연구소 설립 후인 1990년부터 2011년까지를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기점으로 삼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후반 김충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남명학은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남명 중심의 연구에서 범위를 확대해 남명 제자들을 통해 남명사상의 계승 양상을 구명해 남명 정신이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본보기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남명탄신 500주년을 맞아 남명학과 다른 학파와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유학사에서 남명학의 특징을 학계에 널리 알렸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남명학의 국제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껏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남명학 연구의 발전 과제도 적지 않다.
20여년 동안 ‘남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연구 성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직 남명 선생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는 적어도 경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굳이 퇴계선생과 비교하지 않더라고 남명의 정신과 학문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전 국민들이 인식할 때 까지 관계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The 16th century was a epoch-making time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use of the appearance of two greatest scholars, Nammyeong(南冥) Jo Sik(曺植) and T'oegye(退溪) Yi Hwang(李滉) who were leaders for the direction from the time forward in the intellectrual history of Korea. The difference of academic thinkings and political ideas between them clearly exposed at the beginning was one of the origins of the prosperity from 16th to 17th century in our intellectual history as their disciples were founding principal schools. On the other hand, it also brought about such serious matters as the start of confrontations and discordances between two leading schools. As Nammyeonghakpa(南冥學派) went on disorganization as a school after 17th century as well as downfall in the political world, it had been intensively under political oppression other than T'oegyehakpa(退溪學派) even in the political position similar to it within the political world. But, the negative understandings and evaluations of Nammyeonghak(南冥學) or Nammyeonghakpa in the next generation had virtually started from the discordance and conflict with T'oegye in academic thoughts and political ideas. Yi Hwang who considered as his own duty to restore the soˇngnihak(性理學) because of his awareness of the time being as a corruption conflicted undoubtedly with Nammyeong and his school, by bringing up the dispute of deviation from soˇngnihak's orthodoxy in the academic thinkings of Jo Sik made a difference with him. It also meaned the open of harsh criticism or denial against Nammyeonghak and its school. Such criticisms or negative opinions for Nammyeonghak grew in place after the severe criticisms for Chong Yinhong(鄭仁弘) who was a follower of Jo Sik. The typical critic was the Noronpa(老論派) of soyin(西人) from Yulgok(栗谷) Yi I(李珥) to Taekdang(澤堂) Yi Sik(李植). Especially Yi Sik among them tried to build the foundation of political justification by giving a criticism for Nammyeonghakpa including Chong Yinhong. Along with it, he also tried to give a harsh criticism in a full scale against Nammyeonghak through his large number of writings. After the members of Noronpa of Soyin were influenced by or followed his critical opinions, it ended up to the peak of criticism in the line of Nong'am(農巖) Kim Changhyup(金昌協) and his disciples. Kim Changhyup took a strongly critical and negative position other than Song Siyeol(宋時烈), his master, had a flexible position against Nammyeong. In the end, his negative opinions spreaded out and developed into an intensive criticism in the line of Chong'am (正庵) Yi Hyeon'ik(李顯益) who was his loyal disciple. However, in spite of the harsh journey of Nammyeonghak which had been denied even the worth for its being in history, it came to be a comeback because of its revaluation movement by the scholars of Kyeong sang Namdo(慶尙南道) province in 19th century. As it was in the 19th century of the crisis era, a group of scholars in the province started the revaluation movement of Nammyeonghak and its actual values. The movement was growing much more and continued steady to 20th century. Those flows of Nammyeonghak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me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of understanding newly of the merit of Nammyeonghak and its reappearance. In brief, still within such continuous circumstances in crisis up to now, we started to revaluate the worth for Nammyeonghak's being as the valid thought even in our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