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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맨스필드 장원』의 성직자 인물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초반 영국 성직자의 모습과 종교적 분위기를 살펴보 고자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성직자의 전형인 『오만과 편견』의 윌리엄 콜린즈 목사에 대한 풍자를 통해 작가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세속화된 목사들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교회의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맨스필드 장원』에서 오스틴은 도덕성과 소명의식,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에드먼드 버트람이라는 바람직한 성직자 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복음주의 운동으로 불붙여진 성직 쇄신과 교회의 정화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요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아울러 작가는 두 성직자 인물들의 대조적인 가정생활의 성격을 통하여 성직자로서의 자질과 사적 영역인 가정생활의 행복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5,200원
        2.
        202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전반 동안 일본의 우키요에에 독립된 풍경이란 주제가 등장하여 대표적 유형으로 정착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우키요에의 본격적 출발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후지산 36경》(1830-1832)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쿠 사이가 고안한 우키요에의 특징들은 안도 히로시게로 계승되어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우키요에로 발전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에서 나타나는 서양화의 기법들은 물론, 일본화 특유의 특징들과 서양화 기법들을 조화시키는 특유의 수법들이 18세기 말부터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로써 네덜란드 상인과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과 나가사키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서적 속의 삽화들과 동판화를 통해 알게 된 서양화의 기법들을 모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일본의 회화적 전통과 어우러지게 혼합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풍경 우키요에의 차이와 특징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복합적인 시점과 독특한 구도,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자연 묘사로 19세기 후반 서구 미술가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던 풍경 우키요에 양식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고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된 토착화의 결과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6,000원
        3.
        2018.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The 19th century’s international law distinguished civilized from non-civilized States resulting in any country desiring equal treatment was required to obtain recognition from those already deemed civilized. Japan was able to join the civilized world by presenting a civilized image of itself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which was depicted by Western legal scholars as a clash between barbarism and civilization. Neither Japanese nor Western scholars of international law, however, have touched on the issue of the Triple Intervention. This incident serves as a case study for re-evaluating the operation of Western countries’ international legal standards. The argument is, that these countries cloak their motives in legal language for self-aggrandizement, thereby demonstrating the ahistorical nature of the West’s rhetoric of civilization. Further, this incident taught Japan the lesson that international law is concerned not with morality but with power.
        4.
        2013.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focuses on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of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who was active in England during Victorian Ag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refers to both James Wyatt and his Granddaughter, Mary Wyatt (1849) and Eliza Wyatt and her Daughter, Sarah Wyatt (1850), and these paintings were done for his patron James Wyatt in the early stage of Pre-Raphaelites Brotherhood (P.R.B.). In the 19th century, the British Academy of painting did not move forward from just imitating the works of the past, paying the best tribute to Raphael and Michelangelo and pursuing Joshua Reynolds’s Discourses on Art of 18th century. In criticizing such a stream, P.R.B. came up to the surface in 1848 initiated by Millais, William Holman Hunt, and Dante Gabriel Rossetti with an emphasis on recovering sincerity in painting. In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it contains various features. In this paper, these specific features are divided into two parts: detailed expression and expression of distorted perspective. It seems that P.R.B.’s belief that thorough observation on small details opens to a window to find the truth in them played as a source to enable detailed depiction. And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distorted the perspective of the high Renaissance traditional perspective. Distorted perspective makes viewers to look at the painting with the same perspective, which suggests a new approach of seeing the picture, not separating the center and periphery in the painting. This study shows that ‘images-within-images’ of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function reversely from those in traditional art and they are directly reflecting the ideology attached to women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of Britain. In this paper, it analyzes that ‘images-within-images’ have two different characters at the same time. Thus,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that this approach provides a chance to explore the implications in wider extent, instead of just seeing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as family pictures. This study interprets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in line with the characteristics of P.R.B.. Therefore capturing various hidden meanings from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and allowing better understanding of the work.
        5,800원
        9.
        2006.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 of this paper is to figure out how to write the role of women in mission by analysing two writings of mission history: one from women's history (Dana Lee Robert's writing)and the other from feminist history (Lesley Orr Macdoland). This paper aims to demonstrate the historical perspective and methodology for women in mission and identifies a certain view of Asian women in mission in the fields of western historiography for women. This paper adapts critical analysis in terms of methodology and perspectives on the writings. Two important works on mission history have been published: firstly, American Women in Mission: A Social History of Their Thought and Practice written by Dana Lee Robert in 1997; secondly, A Unique and Glorious Mission; Women and Presbyterianism in Scotland, 1830-1930 written by Lesley A. Orr MacDonald in 2000. The two writings share some similarities and at the same time differences in terms of the women's and feminist concepts of history. Both historians' writings are overlapped and integrated in the same theme, namely women in mission. There are some discussible issues on the writings of women from a Asian perspective. First of all, the limited use of materials was problematic. Both historians used only English sources writing about women in mission fields where were located out of the United Kingdom and the U.S.A. Even though the stories were about western missionary women, the historians objectively needed to deal with the indigenous women's feeling and assessment of missionary women. Their use of sources thus reflects a kind of favouritism. Secondly, Women's history emphasises only the clear lack of historical achievements by male-centred studies in the existing histories. Feminist history stresses upon the dual structure between men and women with the analysis and method of women's story. Their historiographies are not appropriate in order to clarify the significance of women's rol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people in mission fields. The absence of such practical aspects of mission impairs their analysis of the story of women in history. Thirdly, they mainly focus on the public work and try to justify women's status in mission in terms of concord and discord between women and institutions, thus using the same criteria for success. If we regarded a lot of hidden women in mission in practice, the historical research has to possess much wider insight of research objects, women, in mission history. Through the research of this thesis and with an Asian view, the researcher obtains how to develop historical research on the role of women in mission into the way of historical writing for women in a manner that reflect the strengths of the methodologies review in this paper, and redress their weaknesses.
        8,700원
        12.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 동해라는 바다 명칭이 일본해 또는 다른 명칭으로 분지되는 과정과 관련된 한ㆍ일 양국 간의 인식을 통해 식민주의적 권력과 지식체계가 어떻게 상호구성적으로 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는 외교문서ㆍ신문기사ㆍ고지도ㆍ어업협정문서ㆍ연설문 등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담론의 구성과 그 전략의 실천, 영토 및 해양경계에 관한 지역지식 및 가치체계의 전도양상, 명칭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해석방식 등에 대해 포괄적 접근을 하였다. 19세기 말엽은 한ㆍ일 양국에 있어서 해양공간과 관련된 영토성과 역사성이 변화하는 변곡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이 아프리카에 확대되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도 서구의 문명개념이 식민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사회가 식민지상품경제체계로 들어가면서 국가경계를 넘은 식민주의적 상업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서구의 문명개념은 식민주의적 영토성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진화론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문명관념을 통해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체계의 전도와 ‘군국’(軍國)의 새로운 영토적 범주의 창출, 영토화된 공간에 대한 개념화 등을 정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식민주의를 창출한 사상가들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사상에 내재하던 ‘동문(同文)’,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개념을 일본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동해보다 과거 서구의 탐험가들이나 외교관들이 제작한 고지도 속에 기록된 일본해라는 바다 명칭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과 주권선의 설정을 통한 영토성 구축,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과 반개(半開)라는 일본식 진화론적 사상의 정립, 참모본부ㆍ흑룡회ㆍ수산업자 등이 일본해 명칭을 사용한 사례들은 바다 이름이 문화 정치적ㆍ군사적 차원에서 상호영향을 주면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19세기 한국인들의 바다 개념은 연해ㆍ내양ㆍ외양ㆍ원양 등의 범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국제해양법에서 정한 영해와 인접수역을 포괄하는 해역과 어느 정도 유사한 범위를 나타내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동해라는 바다 명칭은 동아시아인들이 하늘과 땅, 해, 달, 별자리, 산악, 바다, 강 등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정하며 그 방위를 주재하는 신을 위치시키는 공간인식방식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동해란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다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는 각 바다마다 신이 있다고 믿어 양양에 동해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해신묘를 두었다. 이 점은 동해에 대해 조선왕조의 왕권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동해ㆍ조선해ㆍ한국해로, 일부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 서해로, 중국의 왕지춘(王之春)은 고려해협 등으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엽 일본의 명치 정부에서는 동해 대신에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불렀다.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식민주의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과정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공칭화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말엽, 식민주의적 영토지식과 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바다공간을 군사적 지배영역으로 전환하면서 동해를 일본화된 해양공간으로 범주화하는 과정과 관련됨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해양공간에 대해 영토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명치 정부의 관료ㆍ군부ㆍ지식인ㆍ사상가ㆍ소기업가 등의 식민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영토적 장소만들기와 그 지배권의 제도적 실천 등이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일본해가 동해 대신에 바다 이름으로 부각되는 과정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바다 분류체계의 해체, 일본의 식민주의 확대를 통한 동해 지배권 확대, 일본해 명칭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 등이 상호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함으로써 일본의 영토가 영해로 둘러싸여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문화 정치적 전략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3.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1830s was a crucial decade within the shifting context of American religious culture in the nineteenth century. This changing context had an influence on the way religious conversion was viewed, especially on the Frontier. One significant religious leader in this period was Alexander Campbell (1788-1866). In an attempt to position himself in relation to both Calvinist and Arminian theologies, Campbell was further required to respond to the growing tide of both revivalism and restoration in America. In the end, with the rise and spread of both revivalism and Joseph Smith and the Latter-day Saints on the American frontier, Campbell offered his own morphology of religious conversion. Based upon his reading of the Scriptures, he proposed “immersion” as the spiritual act that procures religious conversion in the individual. Campbell’s The Christian System (1839) offers a full reading of his view of religious conversion, being the most systematic of his written theological statements. Within the pages of The Christian System, Campbell develops an apologia for religious experience, one that he identifies as biblical and at the same time avoids two perceived extremes: “Enthusiasm” (revivalism) and “delusion” (Campbell’s response to Joseph Smith and the Latter-day Sai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