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영어와 영문학에 기여한 대표적인 요인으로 교육혁명과 윌리엄 틴데일의 성경 번역을 들 수 있다. 인본주의와 실용성에 근거한 에라스뮈스의 수사학 이론과 번역된 고전들은 많은 영국 작가들을 위한 토양이 되었다. 이와 같은 환 경에서 교육받은 틴데일은 성경은 모국어로 읽어야 한다는 신학적 동기를 가지고 그의 역서에서 원어의 성경적 의미는 놓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도 웅장한 구사를 할 수 있었다. 틴데일 성경에 사용된 다양한 새로운 단어들, 관용구들, 그리고 수사적 장치들은 16세기의 언어적이고 문학적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틴데일이 없었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와 그 이후에 나타난 직설적인 산문체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당대 영국 작가들의 역동적이면서도 간결한 문어체도 없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의 종교들이 전 지구적인 전염병의 위험에 대비하여 새로운 유형의 대안 의례를 생산하고 실천하는 현상에 대해서 미셸드 세르토의 전략 과 전술 개념을 차용하여 해석하고 고찰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세르토의 ‘전략’은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지배자의 행위가 피지배자들을 통치하는 계산이라면, ‘전술’은 약자가 강자의 지배 영역 안에서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행위의 공간을 생산하면서 승리하려는 작전의 실천이다. 본래적인 의미의 종교의 의례는 공간의 무한함과 무질서에서 중심을 설정하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내 부의 장소를 구축하는 장소화 전략이다. 본래적인 종교의 의례에 함축되어 있는 권력 관계와 피지배자들에 대한 가시적인 통제를 전략이라고 본다면, 가상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이버(온라인) 의례는 종교 내부의 위계질서와 인체에 침범 하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장소의 공간화를 실천하면서 전술적 성공을 이룬다.
이 논문은 소로우의 『윌든—숲속에서의 생활』과 법정의 산문집 『무소유』 속에 담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생명존엄 사상에 주목한다. 두 사상가가 각자의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삶으로 드러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속에서 법정 스님 사상의 근본인 불교 경전 『법화경』에서 말하는 ‘생명존엄’ 과 이를 삶으로 실천하는 ‘불경보살의 실천’을 살펴본다. 본 논문은 물질만능시 대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함부로 여기는 세태를 걱정하며 한탄만 하기보다 소로우나 법정스님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존엄을 실천하기를 촉구한다. 자연은 물론 타인의 삶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함께 살아가자고 노력하는 것이 곧 자기를 초월한 삶이고, 자기를 실현하는 유일한 보살도의 실천임을 문학과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한다. 즉, 종교나 인종 혹은 국가라는 조건보다 모든 인간은 생명존엄 사상을 실천하는 이타행이라는 상호연결성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자기실현에 중요한 존재임을 살펴본다.
본 논문의 목적은 상감문학에 나타난 무루간의 형상화 양상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무루간은 전쟁과 승리의 신이자 따밀나두를 상징하는 신이다. 그에 대한 따밀문학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상감 시대에 저작된 상감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 상감 시에서 그는 꾸린지 산의 주인이자 악한 자를 벌하는 무시무시한 신, 처녀에게 사랑의 고통을 주는 신으로 그려진다. 무루간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행해지는 베리얏땀 의식은 결혼하지 않은 연인의 비밀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적 장치로 기능한다. 북인도를 대표하는 산스끄리뜨 문화와 남인도를 대표하는 따밀 문화가 만나면서 상감문학에 나타난 무루간의 형상화 양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 상감 시에 나타난 무루간 의 이미지에 신화적 요소가 더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신성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와 함께 무루간 숭배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며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무루간은 보편적인 신이 되어 세상에 편재하게 된다. 상감문학에 나타난 무루간의 형상화 양상의 변화는 이후 따밀문학사에 등장하는 박띠문학의 태동을 알리는 암시가 된다.
본 논문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맨스필드 장원』의 성직자 인물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초반 영국 성직자의 모습과 종교적 분위기를 살펴보 고자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성직자의 전형인 『오만과 편견』의 윌리엄 콜린즈 목사에 대한 풍자를 통해 작가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세속화된 목사들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교회의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맨스필드 장원』에서 오스틴은 도덕성과 소명의식,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에드먼드 버트람이라는 바람직한 성직자 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복음주의 운동으로 불붙여진 성직 쇄신과 교회의 정화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요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아울러 작가는 두 성직자 인물들의 대조적인 가정생활의 성격을 통하여 성직자로서의 자질과 사적 영역인 가정생활의 행복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 논문은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소위 혹스-오코너 논쟁을 다룬다. 존 혹스는 작가가 너무 공격적 그리고 가학적 성향의 창조적 충동, 즉 그로테스크하게 작 중인물을 다루어 신성의 속성보다 아이들의 고통에 더 눈길이 가게 한다는 점에서 ‘악령적 편’에 있다고 보았다. 이 해석에 반대하는 오코너는 헤이즐 모우츠가 ‘프로테스탄트 성인’이라고 강조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혹독한 작중인물들은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게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옹호한다. ‘프로테스탄트 성인’으로서의 오코너의 모우츠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막스 베버와 장 칼뱅으로 대변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시각을 살펴 본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시각은 은총과 구원을 강조하는 오코너의 기독교 시각을 대변하지 못한다. 베버보다는 전형적으로 성경에 입각한 원래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은총과 구원을 강조하는 오코너의 시각에 부합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칼뱅적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른들의 잘못된 구원관과 부모들의 왜곡된 삶으로 ‘길 잃은 양’들이 된 이 작중인물들을 보면서 왜 오코너가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종교적 시각의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의 취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17세기 영국 여성의 자전적 신앙 산문을 소개하고 연구 대상으로 조명하는 데 있다. 『아그네스 보몬트의 박해 서사』로 알려진 이 자전적 신앙 산문은 22세 중하층 여성의 1인칭 저술이고 현재 필사본으로 남아있다. 아그네스 보몬트의 생애, 『박해』의 필사본 특성, 전개 양상, 집필 동기에 대해 고찰하면서 이 산문이 갖는 컨텍스트와 텍스트적 특이점들을 살펴본다. 이 글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세한 비평적 소개를 통해 『박해』를 학술적 연구 범주로 끌어오고 앞으로 다양한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의 목표는 아그네스 보몬트의 서술 전략을 조망하면서 『박해』를 종교와 문학이 매개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 기술혁명 시대에 인간을 뛰어넘는 인조인간의 창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전으로 ‘숨은 신’의 흔적이 지워진 세상에서 인간이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조인간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감정을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동시에 인조인간은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죽음을 극복 할 수 있는 불멸을 추구한다. 유발 하라리는 인조인간이 중심이 되는 미래사회를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정의한다. 영화 속의 CEO이자 창조자 네이던 베이트 맨은 인조인간이 중심의 미래사회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내적으로는 인류의 종말이라는 현실에 절망하며 종국엔 자신의 피조물인 에이바와 교코에 의해 살해당한다. 검색엔진 회사 ‘블루북’의 사원 케일럽 스미스는 인조인간 에이바를 사랑하지만 역시 배신당한다. 네이던과 케일럽은 신이 부재한 인공지능 기반 과학기술문명 사회에서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인간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인류는 지워버린 ‘숨은 신’을 다시 소환하여 ‘신의 현존 앞에서’ 영생, 불멸, 신성의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몰타의 유대인』에 등장하는 애비게일이 당시의 여성성, 연극성,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향한 부정적 시선을 집약적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논의한다. 종교개혁 이후 영국에서 반연극주의와 반가톨릭주의는 모두 의복이 그 착용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의심에 기반해 있었고, 이는 곧 가톨릭 종교의복이 무대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애비게일은 유대인 여성으로 등장했다가 극의 후반부에 가톨릭 수녀로 개종하면서 탐욕스러운 유대인이나 위선적인 가톨릭 종교인의 부정적인 전형들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운 인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말로우의 무대 위에서 수녀복을 착용하고 소년 배우에 의해서 연기되었던 애비게일은 기만, 위선, 문란함, 미성숙함과 같이 일찍이 수녀 복장에 부여되어왔던 부정적 정서들을 소환해 내기에 애비게일의 성스러움이란 텍스트 안에서나 유효하다. 일관되게 성스러운 여성을 재현하는 것은 당시 영국 무대에 주어진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으며, 초기 근대 영국 무대 위 수녀들은 반가톨릭적, 반연극적, 반여성적 정서 속에서 종교 개혁 이후 영국 무대가 당면한 재현의 위기를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