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닐은 미국의 현대연극에서 다양한 형태의 극을 저술하였다. 오닐은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를 통해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수행되고 있는 청교도 사회의 지나친 도덕적 억압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라비니아의 청교도적 엄격함과 위선이 촉발시킨 비극적 운명의 연쇄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한 희생적인 삶이 제공해줄 수 있는 희망적 메시지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청교도적 운명의 비극적 연쇄작용을 끊어내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한 채, 고통스러운 속죄의 시간을 갖는 시대적 희생자로서의 라비니아를 다른 인물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오닐은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이 청교도적 엄격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청교도적 비극의 굴레와 속박에 구속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청교도를 대표하는 마농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비극적 역사의 굴레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라비니아는 세상과 단절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수용하고 있다. 결국, 라비니아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속죄를 통한 자기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인식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
예로부터 인간은 신과 교감을 하기 위한 매개체로 향을 이용해왔다. 인간은 신을 감지(感知)의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감각인 후각을 통해 신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향수는 이제 ‘최고의 아름다움’[神聖 性]으로 가장(假裝)하고 악취로 표출되는 인간의 욕망을 감추는 도구가 되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향수』는 주인공 그르누이(Grenouille)를 통해 향에 내포된 이러한 이중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 글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신의 냄새’를 소유하고자 하는 그르누이의 감각의 여정 속에서 노출되는 인간의 위선과 기만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그 ‘아름다운 신의 냄새’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 곧 신성성을 향한 감각의 변질과정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고찰은 감성적 지각을 강조한 뵈메의 ‘분위기’(Atmosphäre) 개념과 감각의 영적인 회복을 주장한 발타살의 ‘따뜻함’(Wärme) 개념을 토대로 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철학적이고 기독교적 인간학의 입장에서 트랜스휴머니즘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이보그를 통한 생명 연장의 문제에 대하여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사이보그 기술을 통한 영원에 가까운 생명의 획득은 데카르트의 영육이원론과 인간 정신이해에 기초해 있으며, 자유 시장 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가르침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으며, 정신과 몸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더욱이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의 관념은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인간 욕망의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반성을 품고 있으며, 그 반성을 기초로 인간의 욕망을 극복한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사상은 사이보그 기술을 바탕으로 한 트랜스휴머니즘의 생명 연장에 도전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이보그 기술을 통한 영생추구를 비판하고 인도하는 오래된 지혜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테스』와「약한 자의 슬픔」은 발표된 시기와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 하고, 근대화 시대의 상징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대의 상징 권력 하에서 여성은 여전히 쉽게 타자로 간주 된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삶은 사랑과 종교 담론에 밀접한 관련성을 갖게 된다. 두 작품 속에 나타나는 주인공인 테스와 엘리자베트가 꿈꾸는 낭만적 사랑은 근대화 시대의 상징 권력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궁극적으로 사회의 상징 권력에 대한 개인적 태도에 따라서 미래의 삶에 대한 양상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품의 비교는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 하는데 문학적 지혜를 제공한다. 위기에 놓인 인간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모색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근대, 근대화, 탈근대라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각 시대의 상징 권력을 뛰어넘음으로써 참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 사회적 상징 권력에 종속되거나 패배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을 꿈꿀 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는 점을 두 작품은 보여준다.
『깊은 강 』은 엔도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던 문학적 테마인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을 탐구한 역작이다. 마음의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받기 위해 인도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힌두적 환경과 갠지스 강을 통하여 개별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고통을 무화시키는 갠지스 강은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전생까지도 함께 포용해 흐르는 신적 실재로 나타난다. 어머니로서의 강은 영혼을 정화하며 초월을 지향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엔도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서양의 하나님을 체화하지 못하고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예수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고통을 위무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인간의 모범을 보여준 성자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성을 고양시키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관점에서 은유적 성육신에 해당하고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성육신은 반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예수를 본받은 오쓰의 성육신은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의 원형으로 떠오를 수 있다.
이 논문은 1988년 부커상 수상작인 피터 캐리의『오스카와 루신다』에 재현 된 영국의 선교활동에 나타난 호주 원주민의 식민화 정책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성공회 사제 오스카는 가난을 핑계로 시작한 도박에 중독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호주 파견을 자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주로 가는 『리바이어던』 호의 비싼 비용을 치르기 위해 도박을 지속한다. 호주에서도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루신다와 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유리 교회를 제작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심지어 오스카는 살인을 저지른다. 문제는 제프리스가 제국의 임무 완수를 위해 호주 원주민을 살육한 것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살인은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호주 원주민은 이러한 오스카를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로 숭배하고, 오스카는 그 호주 원주민에게 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작가 캐리는 유리 교회에 갇혀 죽게 함으로써 오스카 사제의 종교적 위선과 기만을 풍자한다. 이에 의해『오스카와 루신다』를 기독교와 더불어 영국 제국주의의 허위성과 폭력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밀턴은 정치, 표현의 자유, 인권, 이혼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시민 사회의 필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선각자였지만, 유독 젠더의 평등, 여성의 지위, 남녀의 역할 등의 문제에서는 보수적이고 최악의 경우 여성혐오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비난받아왔다. 이 연구는 이런 주제에 대한 밀턴의 사상을 재해석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행위에서 이미 젠더의 평등을 완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결론 맺는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첫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됐음을 선 언하고 두 성별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턴의 결혼관은 바로 이 점에 기초하여 타락 이전부터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로 창조 되었다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밀턴에게 있어 남자와 여자는 상호 동반자로서 이성적 의존의 관계와 대화를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성(性)은 “혼인한 사랑”의 관계에서 우선순위가 아닌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 논문「말라르메와 김구용의 ‘반수신’에 나타난 위선에 관한 비교 연구— 칸트의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의 목적은 말라르메와 김구용의 반수신을 칸트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비교연구 함으로써 인간의 위선에 대한 두 태도를 밝히는 것이다. II장에서는 말라르메와 김구용의 반수신의 공통점이 논의되었다. 첫째 공통점은 반수신이 동물성의 우위로서 반인반수의 신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둘째 공통점은 반수신이 이성으로부터 도피하여 본능의 지배를 받고자 하는, 동물적 존재자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III장에서는 말라르메와 김구용의 반수 신의 차이점이 논의되었다. 첫째 차이점은 말라르메의 반수신은 사랑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반면, 김구용의 반수신은 증오의 화신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둘째 차이점은 말라르메의 반수신이 영육(靈肉)의 모순이라는 주제에서 탄생했다면, 김구용의 반수신은 전쟁과 평화의 모순이란 주제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IV장에서는 결론적으로 두 시인에게서 ‘반수신’이란 존재의 상징이 위선의 가면이 벗겨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폭로로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요구함을 제시하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우선적으로 노벨문학수상작『노인과 바다』로 상기되는 작가로서 그의 글쓰기는 많은 학술연구자들이 언급했듯이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 하다. 반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스타일은 다소 복잡하다. 그것은 인간이 전쟁에 처한 극한 현실과 내면의 세계에서 겪는 도덕적·종교적인 딜레마를 시사한다. 이에, 그간 그의 작품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연구들이 있지만, 본고는 스페인 내전에서 인물들의 행동과 사상을 지배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종교적 딜레마를 고찰해 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전쟁의 실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의 취미인 낚시와 사냥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 중에 다리 폭파의 임무를 위해 모인 소그룹 내의 다양한 계급과 인종들 간의 종교적 대립과 타협을 보여준다. 또한 각자 지니고 있는 가치관은 전쟁으로 인해 퇴색되어 생존을 위한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도덕적 즉, 종교적 딜레마에 사로잡힌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과 안셀모가 윤리적·종교적인 선택의 기로에 처할 때마다 독백과 기도를 통해 살인을 합리화 시키는 장면들은 이론과 실재의 간극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종교적 딜레마의 단면이다.
이 논문은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작은 아씨들』에 드러난 음식과 식탁 교제에 관한 장면들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작은 아씨들』에 드러나는 식사 장면은 루이자 메이 올코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나눔 정신과 프루트랜드 공동체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올코트 가족이 참여했던 프루트랜드는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준 음식을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빵과 야채의 소박한 식사를 주식으로 허용하였고, 올코트 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기독교는 가난한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헌신과 배려의 식탁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이웃을 보살피는『작은 아씨들』의 마치 가족은 자신들의 식탁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고, 타인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일 겉치레의 식탁이 아닌 자신들의 사정에 맞는 식탁을 차리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깨닫는다. 기독교적 실용주의를 실천한 올코트 가족의 부엌은 검소함과 헌신으로 공동체의 생명력을 양육한다.
마사 C. 누스바움(Martha C. Nusbaum)은『정치적 감정』(Political Emotions) 에서 공적 자산으로서 정치적 감정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누스바움은 연민과 공감이라는 인간 이해의 감정이 배제된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혁을 위해 문학을 포함한 예술적 상상력을 통한 사랑의 감정 소환을 주장한다. 그녀의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는 주제어인 정의, 사랑, 정치적 감정은 ‘e pluribus unum’으로 표상된다. ‘e pluribus unum’은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뜻으로, ‘품위 있는 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정치적 대안으로 나타난다. 누스바움은 보편적 인간의 사랑이라는 공적 감정을 강조하면서도 종교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배제한다. 그녀가 제안하는 온전한 정의로운 사회는 인간 중심의 세속적 사회에 한정된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궁극적 관심과 우주의 시원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을 배제한 품위 있는 사회는 온전하다고 보기 어렵다. 문학과 예술적 상상력의 사랑에 편중하고 종교적 상상력의 사랑을 배제한 누스바움의 정치철학은 인간 감정과 삶의 조건을 단순화시켰다는 한계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