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만인사제설은 일반 시민도 사제가 된다는 믿음을 성경을 통하여 확인 시켜 주었다. 김흥호는 목사들이 가졌던 세속적 권리를 포기했다. 김흥호는 다석을 만나 후에 35세에 시간 제단 즉 가온찍기라는 근본 체험을 한 후에 한 끼만을 먹는 약속을 하나님에게 했으며 이런 결심은 자아가 매 순간 죽는 고난이며 십자가의 길임을 보여주셨다. 루터는 교회의 권력을 시민에게 양도하는 혁명을 일으켰고 내면의 신앙을 국가가 침범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는다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루터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혁명을 이룬 존 칼뱅과는 다르게 내면의 신앙을 지키며 내면에 계신 천국을 보여 주었다. 루터와 김흥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공통된 신앙을 가졌으나 김흥호는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권력을 남용하거 나 부패한 국가에 김흥호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탐욕이 가장 큰 죄라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세상의 법으로 인간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며 그것이 루터의 입장이다. 김흥호가 한 끼를 실천한 신앙은 말과 행위를 일치한 다석의 신앙을 실천한 제자라는 증거이다. 김흥호는 서양의 기독교를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 내재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동서양의 고전에서 찾고 실천하여 동양화한 기독교를 실현했다. 그는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한 루터의 개신교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사 랑과 평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타종교를 수용하고 마음속에 있는 천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느끼면서 한국과 동양의 전통을 수용한 참 기독교인이다.
본고는 『남윤전』과 『최척전』을 중심으로 전쟁으로 인해 공동체가 해체되어 해외를 유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타자와의 연대 양상과 그것의 바탕이 되는 환대의 종교적 상상력에 관해 논의한다. 『남윤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해체된 공동체가 ‘동질성의 연대’를 바탕으로 복원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남윤은 포로 생활 과정에서 ‘조건적 환대’를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노승의 언어로 형상 화되는 종교적 계시는 남윤에게 전쟁 중 만난 타자에 대한 존재적 동일성을 확인시켜준다. 『남윤전』에서는 종교적 계시를 통해 환대하는 자와 환대받는 자 사이의 동질성을 확인해주는 과정에서 환대에 대한 상상력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최척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해체된 공동체가 ‘다름의 연대’를 바탕으로 확장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최척과 옥영은 전쟁으로 인해 유랑하는 과정에서 고난의 운명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무조건적 환대’를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장육금불의 목소리로 형상화되는 종교적 계시는 삶에 대한 실존적 의지적 메시지를 소통한다. 그리고 삶을 매개로 환대하는 자와 환대받는 자 사이의 공감과 연민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과정에서 환대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중세를 대표하는 로만스 장르 중의 하나는 궁정풍 사랑의 문학이다. 이 궁정 풍 사랑의 문학은 12세기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발전한 문학의 한 형태로, 이 사랑은 군주의 부인인 레이디와 기사의 사랑을 주 주제로 삼는다. 이 궁 정풍 사랑은 특히 성모 마리아 숭배 사상과 결합하여 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레 이디를 여신과 같은 지위로 높여 숭배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교회 제도의 영 향을 받아 가부장적 사회가 주축이 되는 중세 시대에 이와 같은 사랑의 형식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본 논문은 15세기 기사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에 그려진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트리스트람 경과 이조드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궁정풍 사랑에 대한 중 세의 시각을 논해 보고자 한다. 그런 후 과연 이와 같은 사랑이 과연 중세 사회 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했는지 중세의 종교, 사회, 문학적인 실재를 중심으로 설 명해보고자 한다.
입다 설화(삿 1:6-12:7)는 중세 랍비들로부터 현대 주석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지대한 관심을 끌어왔지만 학문적 논의들 중 대부분은 입다의 서원 이나 인신제사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평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면에서 아쉬움을 갖는다. 입다를 신명기 사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사사 시대 전체가 과도기였고 입다를 비롯한 모든 사사들이 도덕적·종교적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입다의 특정 행동을 절대적인 신학적 잣대로 평가 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입다 설화 자체가 말해주고자 하는 문학적 표현들에 집중하되, 부족사회에서 태어난 한 서자의 외롭고 치열한 삶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분석한다. 설화자는 입다의 입장에서 사건을 묘사해 주는데 특히 그가 처음에는 조용하고 소극적이었으나 점차 목표지향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인물로 바뀌는 과정을 묘사한다. 어린 시절 상처를 경험했던 입다는 치열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공공히 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자신의 가족과 동족을 잃게 되는 ‘민중적 영웅’으로 생을 마감한다. 군사적 위기의 때에 태어난 큰 용사인 입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미워하여 버린 길르앗지파의 부당한 모습과 암몬과의 전쟁의 순간에 도움을 요청한 에브라임 지파의 안타까운 모습도 함께 분석하여, 입다가 일생동안 공동체로 인해 가졌을 한의 차원에서 해석을 시도한다.
이 연구는 마릴린 로빈슨의 네 번째 소설 『라일라』에서의 주인공의 내적인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 라일라가 깊은 고독과 궁핍, 그리고 버려짐의 아픔을 겪으며 묻게 되는 존재론적인 질문—“사는 게 왜 이런 식이지요?”—은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한 인간이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존재론적 조건을 고찰 하는 데 있어, “앎으로서의 무지(unknowing as knowing)”, “부재 속의 실재 (presence in absence)”와 같은 모순적인 개념을 적극 포용했던 크리스천 신비주 의자들의 전통을 되짚고, 그들의 기도의 삶과 라일라의 경험 간 유사성을 제안 한다. 이를 통해 라일라의 질문이 가진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어 둠”의 경험이 “빛”을 경험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전제됨을 주장한다. 또한 존 칼 뱅이 주창한 “하나님의 극장(the theatre of God)”으로서의 인간의 인식을 적극 차용하여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 중재 없는 성경 읽기, 에임스 목사와의 관계, 그리고 한 이방인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인식에 일어나는 미묘하나 점진적인 변화를 분석한다. 이 문학작품의 이러한 신학적 읽기는 몇몇 비평가들과 다르게 라일라의 변화에서 깊은 낙관론을 발견하게 하며, 인간의 고통과 무지 속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논문은 아놀드가 쓴 「오버만의 작가를 추모하는 시」에 나타난 세난코의 내적 성찰을 주로 다룬다.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신심의 상실에 대면하며 인간 삶의 비참함과 인간의 유한함에서 비롯되는 지속적인 고통에 대하여 세난코 가 어떻게 통찰하며 반응하였는가를 살펴본다. 이러한 세난코의 반응을 고찰함에 있어서 그가 특히 자연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내면의 세계에 잠재하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소생시키고자 했다는 것에 역점을 둔다. 아놀드는 세난코가 가졌던 신, 인간,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에 큰 감흥을 얻었으며 그가 당대의 영적 고갈상태를 일깨워 줄 수 있음을 이 시를 통해 구현해 주고 있다. 본 논문은 아놀 드가 영적 불안의 시대에 인간의 내적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영성과 영원성에 대한 갈구함을 강조함으로써 영적인 세계를 강화시키는 혜안을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 있음을 밝힌다.
본 논문은 단테의 연옥에 등장하는 칠죄종(7대 죄악)이 현대판 신곡이라 할 수 있는 데이빗 핀쳐의 영화 <세븐>과 비교해서 훨씬 “열린” 문학적 공간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단테의 열린 공간은 도덕은 진보한다는 믿음과 달리 현대적 영화의 공간보다 개방적이다. 연옥의 열린 공간에서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난을 통해 해방을 획득할 수 있다면, <세븐>과 같은 누아르 영화가 등장시키는 자본주의의 공간인 “닫힌” 현대 도시는 그 속에 거주한다는 사실로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가둔다. 이 열림과 닫힘의 역설적인 변화는 자본주의 발전을 변수로 하는 로그 함수의 그래프를 따르고 누아르 영화에서 재현되는 현대 도시는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공간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