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모리악은 선배 작가였던 앙드레 지드가 보낸 “소설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큰 고민에 빠졌다. 이 고민은 모리악이 자신의 문학관을 총체적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진실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지드의 주장과는 달리, 모리악은 이 둘 사이의 공존을 선택했다. 모리악은 진실한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진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리악의 작품에서 기독교적 구원과 세속적 인간 비극의 주제가 함께 공존하고, 은총과 죄가 함께 공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모리악은 작가의 존재론적 위치를 신의 모방자이자 신의 사도와도 같은 것으로 정립한다. 인간 실존과 은총의 개입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카이로스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작가가 하나님과 같이 전능한 창조자는 아니다. 작가의 창작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다. 작가는 인물이나 독자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도 없다. 작가는 그저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작품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작가는 비극적 실존의 현장과 은총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위해 그 주어진 상황들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와 범대순(1930∼2014)을 산에 관한 시편을 중심으로 비교하였다. 두 시인의 생애와 시는 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연구자는 두 시인이 산행을 통하여 체험한 내용을 밝히고자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환경 심리학자 캐플런 박사는 산림이 주는 효과를 주의력 회복 이론으로 설명한다. 산림은 사람에게 해방감, 매혹감, 확장감, 조화감 등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두 시인의 산 시편 속에서 이러한 양생의 체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시인의 산행은 더욱 심오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깊어지게 되면서 두 시인은 궁극적으로 산에서 야성을 체험하게 된다. 스나이더의 경우 야성은 불교의 다르마, 혹은 도교의 도와 연관된 개념이며, 그의 시에서 야성은 “조직화된 혼돈,” “유동성,” “무상” 등의 의미로 집약될 수 있다. 한편 범대순의 시에서 야성은 원시적 생명력과 디오니소스적 혼돈을 의미한다. 두 시인이 산행을 통해서 체험한 양생과 야생은 산이 지닌 힘과 치유 가능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산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사랑은 문명의 지속 불가능한 발전에 대한 성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은 존 던과 조지 허버트의 시에 드러난 죽음관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들은 17세기 초 잉글랜드의 성직자이자 형이상학파 시인으로, 서로 교류하며 종교시를 남겼으나, 그들 시의 갈래와 성격은 다르다. 이를 알기 위해 그들의 종교관을 파악하여 시를 분석하였다. 결과적으로 던은 아르미니우스의 사상과 가톨릭의 종교관을 가졌던 반면, 허버트는 칼뱅의 사상과 개신교의 종교관을 가졌다. 그래서 던은 시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행위구원론과 같이 회개라는 인간의 노력을 끊임없이 촉구한다. 또한 가톨릭의 교리와 같이 사후에 연옥과 같은 중도 상태를 드러내며,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 반면 허버트는 시에서 칼뱅주의의 사상과 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확신한다. 또한 개신교의 교리와 같이 사후에 영혼과 육체가 즉시 분리될 것을 언급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특히 그는 몸의 부활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에 드러난 죽음관은 그들의 종교관과 관련한다.
본 연구는 요엘서 전반부(「욜」 1:1-2:17)의 ‘메뚜기 재앙’을 ‘죄-심판-회개-구원’의 언약적 관점의 해석에서 벗어나, 메뚜기 떼로 인한 자연재해의 원인을 문학적 기교인 아이러니(irony)의 관점으로 접근하여 해석한다.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메뚜기 재앙을 통해 보여주는 요엘서 본문은 구체적인 백성들의 죄의 본질에 대해 침묵하면서, 재앙으로 인해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세상과 백성들이 불가피하게 맞이해야 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요엘서는 백성들의 죄에 대해 단순한 회개의 요청을 넘어 올바른 애도의 행위를 통해 그들의 수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요엘서 본문이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또는 침묵하면서 독자가 발견하게 되는 ‘메뚜기 재앙’의 아이러니는 예언서의 언약적 관점에 근거하여 본문이 지지할 수 없는 간격 메우기(gap-filling) 방식의 해석을 지양하고, 오히려 아이러니를 아이러니 그대로 수용하면서 대안적 해석을 모색할 때 정교하게 구성된 요엘서의 문학적 기교와 가치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다사다난하고 혼탁한 시대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탄생한 창선감의록은 마음의 근원에서 진실되게 용서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창선감의록에서 용서는 서로서로 화해할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한 것임을 깨우쳐주었다. 후에 악인 화춘과 심씨는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고 화진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화진은 악인들의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고자 애를 쓰지 않았다. 그는 악인들이 질 책임은 하늘에 맡겼다. 그는 서로가 회복될 때까지 오직 그들의 악행을 견디고 참았다. 단, 화진 자신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루하루 인간애와 충효를 다하였다. 작가는 작품 말미에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리의 본성을 살 때 참된 용서와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