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장의예술은 보수성을 띄며 전례를 중시하기에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민족성과 지 역성이 아닌 시대와 사회 변화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송 말엽 화북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벽화고분은 전례 없는 특이점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 와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벽화고분의 주요 주문자인 묘주층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지적된 바 있다. 송대 이후 성장한 부유한 중간계급은 기존의 상류계급 전유의 고급문화를 선호하여 벽 화고분 축조를 주도했지만, 형식상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벽화의 구성과 양식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는 등 자기화하였다. 북송대 이후의 신흥 묘주층은 벽화고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 을 뿐 아니라 벽화고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이용되는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있 어 북송대 벽화고분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 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볼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북송대 벽화고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이는 벽화 속 <宴飮圖>를 집중 분석하여 이 시대의 벽화고분이 오대 이후 급변한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 이 주목하는 <연음도>는 묘주부부가 한가로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단순히 벽화를 구성 하는 하나의 도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묘주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들의 내세생활을 대변하는 벽화의 중심 주제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그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묘주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강조되며 사자의 특권으로서 현실에서 보기 힘든 신비로운 광경들이 연회의 장면으로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북송대 고분벽화에서의 <연음도>는 묘주의 표현으로부터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이전시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는 ‘세속성’ 의 강화로 요약되며 이는 묘주인 중간계급이 벽화고분 축조와 사용에 투영한 그들만의 바람 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북송대 고분벽화 속 <연음도>에서 세속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 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벽화고분이 오랜 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북송초기 詞는 반세기 이상의 침체기를 맞는다. 그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 몇 가지 사실에 기인했음을 할 수 있다. 첫째로 송을 건국한 통치자들은 남방 제국이 멸망한 이유를 남방의 퇴폐적 음악과 사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남방의 사를 배척했다. 북송 초기 사 작가 대부분이 남방 사람들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송 이전까지 사는 남방에서 흥성한 남방문학이었다. 둘째, 송 건국초기 남방 문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남방왕조의 문신 들을 송조에 등용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남방 문학인 사가 북방 지역에 거점을 둔 북송시대 에 발전할 수 없었다. 셋째, 송은 초기에 남방 여러 나라와의 통일전쟁을 했다. 남방 각 지역 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전쟁은 사가 발전할 사회적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 넷째 정책적으로 사를 금했다. 따라서 사의 발전은 송이 안정되는 북송 중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through the analysis of literature historical material, such as Seonwon chenggyu(禪苑淸 規), Cham cheontae odaesan gi (參天台五臺山記) and so on. The building composition method of Zen Buddhist temple in Northern Song dynasty, which grasped from the Seonwon chenggyu, reflects the actual situation of the temples in that time. And it was ascertained that, the Zen Buddhist temple’s building composition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was basically same to that of Southern Song dynasty. And the comparative analysis was attempted between Zen Buddhist temples and that of other Buddhism sect described in Cham cheontae odaesan gi. From this analysis, the common features as Buddhism temple and the characteristics of building composition as Zen Buddhist temple was clarified.
This paper aims at studying on the medium of cultural interchange regarding who did and how to introduced the new trend of architecture during the period of Koryo Dynasty. Before the era of Koryo Dynasty, Kyungjang(Sutra Pitaka, 經藏) was mainly centered in Kyeongnu with a substantial function of storage. In the early Koryo Dynasty, however, Daejangjeon(大藏殿), which was spatialized for worship, began to appear. Normally, fixed walls were installed and the Sutras were enshrined inside Daejangjeon, while Jeonryunjang (revolving wheel sutras), a type of rational bookshelf, was introduced, and a new trend became developed in Kyungjang construction. Jeonryunjang(revolving wheel sutras, 轉輪藏) is a dharma instrument with a rotational function so that one revolution gives an effect of reading the enshrined Sutra one time, and began to be created actively in the period of the Northern Song. It is considered that the introduction of Jeonryunjang(revolving wheel sutras) to Daejangjeon was resulted from Haejokuksa(慧照國師) Damjin(曇眞) who visited the Kangnam areas in the Northern Song at that time. The Kangjeol areas in the Northern Song, where Damjin concentratively itinerated three times, were the place in which Jeonryunjang was created in many temples. Since Damjin, historical materials and excavated data regarding constructing Jeonryunjang have been discovered in the Buddhist temples, which are related to his pupils and dharma lineage. The only existing Jeonryunjang of Yongmusa Temple in Korea is the one that Joeung Daesunsa, who succeeded to the dharma lineage of Haesokuksa, promoted, and supports strongly such introduction of Jeonryunjang by Haesokuk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