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시가 작품 속 ‘簞瓢’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북송에서 남송으로 이어지는 정치, 사회적 격변 과정에서 문인의 시가 속 ‘簞瓢’의 활용과 수용 과정 중 변화의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문인 사대부의 도덕적 심리적 내면 변화를 고찰하였다. 道의 수양과 일상의 ‘自樂’에 대한 긴밀한 조우를 중요시했음을 근거할 때, 북송 시 기 문인들은 ‘簞瓢’를 통해 소박한 밥상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검약함을 실천하며 학 문적 自樂을 중시하였으며, 남송에 이르러서 권력의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문인들 이 簞瓢를 통해 은일의 삶을 노래하였고, 儒家의 본분을 지키기 쉽지 않게 된 현실 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簞瓢’로써 말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근대시 형성과정에 대한 두 가지의 의문으로 시작 했다. 첫째, 근대시의 형성과정은 개화가사→ 창가→ 신체시→ 자유시로 단계적인 이행을 거쳤을까? 둘째, 19세기말 찬송가의 유입은 창가처럼 노래를 전제한 시가(詩歌) 뿐만 아니라, 신체시와 자유시의 형성에도 상당하게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창가와 신체시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찬송가가 활발하게 번역되면서 개화기의 시가(詩歌)에 영향을 주게 되고, 이후 자유시의 태동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논점은 찬송가는 서양악곡을 기반으로 한 종교음악이었지만 번역과정을 통해 시적(詩的)인 형식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와서 근대시의 형성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 았다. 최남선의 신체시는 그 가운데에 등장하게 된 것이며, 본고는 이를 갈등과 변화 속에서 탄생한 ‘메타모포시스 시학’으로 불러보고자 했다.
예이츠의 바보의 독특성은『환상록』에서 드러나지만, 시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예이츠의 대표작인『환상록』에서 바보는 달의 상 중 제28상에 해당하며 이는 거대한 바퀴의 순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이다. 제목에 “바보”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바보의 노래 두 곡』과『바보의 또 다른 노래』에 대한 읽기를 통해 바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이츠의 바보는 목표나 규칙에 얽매이는 세속적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며, 신적인 지혜를 소유한 자이다. 바보가 지닌 특징은 시에 등장하는 ‘산토끼’, ‘나비’, ‘장미’ 등의 상징들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이는 바보의 내적 갈등이 어떻게 통합으로 이르는지를 보여준다.
이 논문은 南冥 曺植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盧.의 증조부로 조선 초기 함양을 대표하는 인물 松齋 盧叔仝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정 리한 ..松齋實紀..에 수록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송재는 세종 때 집현전에 들어 교리, 응교 등을 거치고 세자시강원 필선, 예문관 직제학 등을 지낸 뒤 호조참판 등에 이른 경력으로 보아 학문과 문장 이 뛰어남을 알 수 있으나, 그가 남긴 시문도 그리 많지 않고 학문을 알 수 있는 것은 .八字遺訓.이 유일하다.
.팔자유훈.은 아들이 충주의 판관으로 나갈 때 지어준 誠·信·廉·公·勤·簡· 和·惠의 여덟 자의 교훈인데, 이전에는 이에 대한 뜻을 풀이한 내용이 있었 다고 하나 지금은 여덟 글자만 남아 있다. 후손들이 이에 풀이를 더한 것을 통하여 그가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뜻과 이를 후손 및 후학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를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그가 남긴 몇 편의 抒情詩와 酬唱詩를 통하여 살필 수 있는 데, 주로 벼슬살이 하는 중간에 느낀 것을 읊은 서정시 10제 11수와 중국 사 신이 왔을 때 지었다고 하는 13제 21수가 분석의 대상이다. 서정시는 지방 에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오가며 보고 느낀 바를 지은 것이 대부분인데 나라 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수창시는 1457년 陳鑑과 高閏이 왔을 때에 지은 7제 10수가 있는데, 이시 들은 모두 당고와 고윤이 성균관을 방문하였을 때, 호조참판으로 그들과 함 께 성균관에 가서 수창한 것이다. 중국 사신을 대접하며 그들의 뜻에 맞추어 시를 지은 것이다. 나머지 祈順에게 화답한 것으로 5수가 있고, 唐皐에게 화답한 것으로 2수 가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기순과 당고는 송재가 별세한 뒤에 사신으로 왔 던 사람들이므로, 이들과 화답한 작품을 송재의 것으로 수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 화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시, 즉 누구와 수창, 화답한 것인지 드러나 있지 않는 작품으로 「臨津舟中酬華使」, 「鳳仙館又次前人」, 「次華使猪灘過橋韻」, 「葱秀嶺又次華使」의 네 수가 있는데, 이 시들은 언제 지은 것 인지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