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저명한 화가로, 고숙화 파(姑孰畵派)의 창시자인 소운종(蕭雲從: 1596-1673)의 산수화 도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소운종 산수화의 도식 특징 에 대한 분석을 시작으로, 산수화 도식의 형성배경과 변화양상 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를 통해 소운종 이 산수화 도식에 끼친 영향과 그 시사점을 새롭게 밝혀냈다.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환경 속에서 사회정세는 매우 혼란했지만 당시 화단(畫壇)은 도리어 더욱 활발해 수준 높은 작품들이 대거 나왔다. 고숙화파의 창시자인 소운종은 당시 산수화 도식의 새로운 풍조를 선도한 화가이다. “경쾌함을 기뻐할 수 있다.(輕快可喜)” 라는 화풍과 독특한 산수화 기하도식 언어는 중국 산수회화사 (山水繪畫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소 운종 산수화 도식은 주변 국가에 전파되어 남종문인화(南宗文 人畫)의 교류 전파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로 인해 소운종의 산수화 도식에 대한 연구는 학술적 의의 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등장해 진중하면서도 탁월한 마티에르가 강조된 추상회화를 보여준 권훈칠은 1980년대 후반 갑작스레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다. 이탈리아 유학 동안에 그는 기존에 꾸준히 천 착해오던 스승 정창섭의 추상화에서 보여지던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방식을 버리고 평소 개인적 으로 관심을 갖던 풍경화에 몰두한다. 풍경화는 그가 이탈리아에 오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려오던 장르였다. 권훈칠의 이러한 풍경 중심의 화풍은 그가 로마에 유학하던 당시 영향받았던 오토첸 토, 즉 이탈리아의 19세기 회화와 연관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운동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조국의 땅과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했던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그리고 피렌체에서 출발한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프랑스의 인상파 운동과 매우 비슷한 화풍을 지녔으나 다루는 주제, 애국심, 그리고 전통적인 르네상스 회화적 구 도 등을 활용하는 새로운 화파였다. 권훈칠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한국의 풍경을 그린 수채화 들은 정적인 공간과 개인의 안식, 그리고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논문은 권훈칠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이탈리아 마티아이올리의 영향을 추적하며 그의 풍경화가 드러내는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만당에서 오대를 거쳐 북송과 남송에 이르는 시대는 중국회화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이 시기 회화의 양상은 이후 중국 회화의 전개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산수화에서는 수묵대관산수 양식의 성립과 발전, 화북산수화와 강남산수화라는 상이한 산수 화 양식의 형성, 문인산수화의 대두를 통해 이후 산수화 전개의 기반을 마련한 전범을 창조 하고 지속적으로 화가들의 창작력을 자극한 여러 화파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오대와 북송대 산수화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고 오대에서 북송을 거쳐 남송 초까지 산수화에 나타난 변화와 그러한 변화의 시대적 배경을 고 찰하여 중국 산수화의 창신 및 전범의 형성과 전통의 성립 과정을 파악하였다. 나아가 북송 과 남송 교체기인 12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원화가인 李唐과 문인화가인 李公年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오대에서 남송에 이르는 산수화의 양식적 변화 및 창조와 모방, 전승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구명하여 이 시기 산수화의 흐름을 조명하였다. 남송대 이 후 중국산수화는 이 시기에 마련된 전통을 계승하고 변용을 거쳐 다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한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음으로 오대에서 남송까지 산수화의 발전과 변화의 양상을 정확하 게 파악하는 것은 후대 산수화의 흐름과 함께 화가의 독자적인 창조를 통한 성취나 작품의 우수성 및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예이츠의 시, 산문, 자서선, 편지에 흩어진 증거와 여러 엑프 라시스 이론에 근거, 예이츠의 청금석 이 어떻게 중국고전시와 풍경화, 특히 도교에 서 보이는 중국전통미학을 반영하는 지 논의한다. 예이츠는 이질적인 중국문화와 대화 하는 매체로서 중국고전시와 풍경화를 사용하는데, 이로써 서양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Capriccio which has emersed in Italy of the 18th century is a new genre of the landscape painting. This genre represents reality, but it is very artificial product correspondingly its concept and character. It's birth place is distributed on various regions in Italy, but the main stage was Rome. Till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Rome was the Holy city of the Grand tour, the home of the Neo-Classicism and furthermore the field where archaeology and art history began to be instituted. On such historical situation the Capriccio came out and was recognized as the best popular genre in the visual art. It was favor of the art collection with the antiquity together and reflected the consciousness of the contemporary to the ancient. This study will examine the phenomena in the newly-developed archaeology and with few representative works of Giovanni Paolo Pannini as central term consider the Capriccio and the archaeological connotation. The systematical and institutional archeology which appeared at the age of the Enlightenment, on the contrary to the critical theories at the same time against capriccio, because it was regarded by them as paradoxical and too much sensitive, utilized it as a theoretical method very actively. Some among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did it, especially Francesco Bianchini distinguished the capriccio from simple imagination and made it a capacity of the knowledge. And through it he wanted to find out the historical truth. The visual art was influenced and encouraged by such attitude of the archaeology. However it's output spreaded out in various courses. While Giovanni Battista Piranesi, the best known Capriccist of the 18th century, tried to revive the antique through the epical value and his own imagination, Pannini gave priority to the strict historical research. In the such context Panni succeed Giovanni Battista Nolli who made the great map of the city Rome. Their Capriccio profited motive and was inspired by the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such as Bianchini and Muratori. The Capriccio reflects not only the academic and popular interest for the antique, but also influenced on the upcoming scientific archaeology vice versa. It caused by their reasonable Interpretation and restoration of the antique through the visual medium. Finally as archaeological landscape Pannini's Capriccio is a historical case, in that the Capriccio applied the theoretical method of the archaeology to make art. It served as a momentum for the connotation to the archaeological thought.
The essence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realization of a space that embraces nature and human integrating the openness and encloseness. The conc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that artificially furnishes natural elegance into urban areas coincides with the spiritual basis of Chinese literati-painting which subjectifies the scenery of objective world and entrusts personal feelings on that. In other words, the ultimate ideal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embodying the Utopia of confucian intellectual in a city. This paper has tried to shed a light on inter-relationship of literati-painting theory and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theory through comparing them. It is the identical spiritual basis they shared harmoniously that made landscape architecture, poetry and painting possible to m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