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이후 대리석이라는 매체의 (재)등장은 동방화라는 사회·문화상의 반영이자, 이후 고 대 그리스의 시각 문화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본 연구는 초기 철기 시대의 그 리스에서 대리석의 사용과 채굴, 수송 등에 관한 전반을 고찰하고, 초기 그리스 미술에서 대리석 을 향유한 개인과 그 작품들을 중심으로 기원전 7세기에 대리석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지녔던 의 미를 추론하고자 한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조각사에서 대리석은 그 향유자들에게 엘리트적 취향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매체였다. 니칸드레와 에우티카르티데스, 그리고 <테라의 코레>의 주 인은 낙소스에서 나온 대리석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선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들이 ‘선택된 자’, 즉 지역 사회의 엘리트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들 초기 대형 독립상은 대리석이 라는 새로운 매체가 지역 사회 엘리트의 심미적 취향과 결합하는 그 시작점이었다.
본 연구는 1960-70년대 서부 미니멀리즘의 작업 경향에서 드러난 지역성을 통해 이들의 독자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서부 미니멀리즘은 로스앤젤레스 화단이 주체적으로 형성한 예술 운 동이라는 의의가 있다. 서부 미니멀리즘은 동시대 뉴욕 미니멀리즘과 유사성을 공유함에도 불구 하고,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의 지역성에 기반한 독자성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독자성이 구축되는 과정은 회화 매체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뉴욕 미니멀리즘과 구별되는 주요한 지점이다. 이에 본 연구는 서부 미니멀리즘의 지역성이 특히 이들의 회화 작업에서 드러났음에 주목한다. 20세기 중반 기존 추상표현주의를 모방하던 로스앤젤레스 화단은 셰이프트 캔버스 및 하드 엣지 형태의 비(非)-전통적 회화 작업을 통해 서부 미니멀리즘을 발단시켰다. 이후 서부 미니멀리즘은 동시대 팝아트와 맞물려 피니쉬 페티쉬(Finish Fetish)로 이어졌다. 이때 피니쉬 페티쉬는 로스 앤젤레스 자동차 문화라는 지역성을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팝아트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였 다. 또한, 서부 미니멀리즘의 회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1970년대 오브제 및 공간 작업으로 전 환한 일부 작가들의 회화로의 복귀로도 나타난다. 회화의 복귀는 3차원 형태의 작업으로 총체적 으로 전환한 뉴욕 미니멀리즘과 비교되는 서부 미니멀리즘의 특징이다.
본 논문은 미술가 정규(鄭圭, 1923-1971)의 미술비평에 나타난 시대의식을 통해 그가 구 상한 전후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을 분석하여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둔다. 창작 활동 이외에도 비평, 교육, 행정 등 미술의 다방면에서 활약한 그의 예술관 중심에는 전전(戰前)에 대한 종합적 반성을 토대로 전후(戰後)라는 새 시대에 적합한 한국 현대미술의 모색이 있었다. 전후 한국미술계는 거 대한 흐름을 형성한 한국 앵포르멜을 중심으로 실존주의의 불안과 부조리를 내적으로 탐구했다. 반면 정규는 실존주의의 휴머니즘에 주목하여 극복의 징후로 이해한 뒤 동시대 한국의 현실에 반응 한 미술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점은 그가 회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던 한국미술계에서 낮은 장르로 취급되던 판화, 도예 등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게 추동했다. 본 연구는 초기 한국 현대 미술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다각도로 이해하기 위하여 전후 시기 새로운 차원의 미술을 시도한 정규를 주목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전후 시기 주요 논객으로 활동했던 그의 저술을 분석하여 그가 궁극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한국 현대미술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 기인 전후 시기 미술에 관해 보다 입체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제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서구에서 기원한 종교적 도상인 ‘피에타’의 한국 작가들의 표현성에 주목하고 그 상징과 의미 작용을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인간의 가장 극심한 고통이라고 보았을 때 종교를 초월하여 죽은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 습을 표현한 피에타는 고난의 상징으로 보편적 공감의 대상이 된다. 이는 종교적 도상으로서의 차용뿐 아니라 전쟁이나 테러, 재앙과도 같은 사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의 고난에 대한 시대 적 상징성을 제시하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 미술에서 주로 다루던 피에타 가 현대 미술 안에서 고난의 상징적 표상을 넘어 위로와 공감의 아이콘이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작 가성이 드러나는 피에타상의 후속 연구에 단초가 되는데 의의가 있다.
1970년대에 등장해 진중하면서도 탁월한 마티에르가 강조된 추상회화를 보여준 권훈칠은 1980년대 후반 갑작스레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다. 이탈리아 유학 동안에 그는 기존에 꾸준히 천 착해오던 스승 정창섭의 추상화에서 보여지던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방식을 버리고 평소 개인적 으로 관심을 갖던 풍경화에 몰두한다. 풍경화는 그가 이탈리아에 오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려오던 장르였다. 권훈칠의 이러한 풍경 중심의 화풍은 그가 로마에 유학하던 당시 영향받았던 오토첸 토, 즉 이탈리아의 19세기 회화와 연관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운동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조국의 땅과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했던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그리고 피렌체에서 출발한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프랑스의 인상파 운동과 매우 비슷한 화풍을 지녔으나 다루는 주제, 애국심, 그리고 전통적인 르네상스 회화적 구 도 등을 활용하는 새로운 화파였다. 권훈칠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한국의 풍경을 그린 수채화 들은 정적인 공간과 개인의 안식, 그리고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논문은 권훈칠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이탈리아 마티아이올리의 영향을 추적하며 그의 풍경화가 드러내는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소니아 보이스는 영국의 아프로-캐리비안계 예술가로 미디어와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와 차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폐해, 흑인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논의해온 작가이다. 보이스는 198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흑인 예술 운동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주류 문화·예술계에서 소외된 여성 예술가들과 연대하여 다양한 예술 활동에 참여해 왔다. 보이스 의 작업이 다시 한 번 미술계에서 주목받게 된 계기는 59회 베니스 비엔날레(2022)에서 영국 국가 관의 대표로 선정되며 최고 국가관에 수여되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간 사회 적 소수자로 분류된 흑인, 여성, 이주민을 영국 미술계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데는 여러 복합 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본 논문에서는 영국의 역사와 정치에서 중요한 격변의 시기에 제작된 보이 스의 대표작품과 전시인 <타잔에서 람보까지: 영국 태생 ‘원주민’은 구성된/자아 이미지와의 관 계와 재구축된 근원에 대해 고려한다>(1987)와 《그녀의 길을 따라》(2022)를 후기 식민주의와 여성주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두 작업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부분은 고정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이 아닌 담론이나 현상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 그 교차하는 접점에 서 어떠한 내·외적 갈등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예술로 변용될지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