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양식적 변화와 이를 설명하는 미술에 대한 문헌들은 공방의 협 업에서 미술가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교회 미술처럼 장소와 미술품이 밀접한 관계를 지닐 때, 공방의 작업과 미술가 개인의 작업은 다르다는 점에서 표 현에 대한 접근 방식도 변화되었다. 이런 점은 공방의 문화를 다루었던 첸니노 첸니니와 미 술의 원리를 다루며 개인의 선택으로서 표현을 다루는 알베르티의 색채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첸니니는 원색에 흰색을 추가해서 명암을 표현했다면, 알베르티는 검정-원색-흰색을 통해 명암을 표현한다. 장소를 매개로 공간 속에서 미술가의 표현을 조절 해야 하는 공방의 입장은 미술가 개인의 역량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자 하는 입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품과 장소의 관계는 15세기 이후 이론이 미술에 대한 담 론을 주도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이질적 표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교회 미술의 사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장소와 미술품의 관계는 양식의 변화를 이해하 는 데 중요한 요인이며, 동시에 이론에 바탕을 둔 이론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대 문인서화가로 유명한 조맹부는 부친 조여은의 취향과 감식안의 영향 하에서 초기 부터 사생과 같은 사실적 기법을 깊이 탐구하였다. 중기에는 희작과 같은 북송수묵화 양식들 을 폭넓게 수용한 뒤, 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변용하고 결합시킴으로써, 사생과 묵희의 개 념을 새롭게 확장시켰다. 장난삼아 사생한다는 뜻의 ‘희위사생’론은 ‘공필사생’과 ‘묵필희작’ 이라는 이질적 기법의 집성을 통해 ‘기운’ 혹은 ‘정성(情性)’을 얻는다는 혁신론이었다. 이는 〈이양도〉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고도로 복합적이고 균형잡힌 조형세계의 또 다른 층위를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렇듯 사실적인 회화세계의 토양 속에서 조맹부는 ‘전신의 묘’를 다하지 못한 당시 사부화가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본고는 문 인화에 사실적 화법을 접목시키려는 조맹부의 탐구와 혁신적 방법론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원대 회화 및 그 향방을 좌우한 그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새롭게 확장시켜준다.
조제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은 인간 경험의 극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착 하는 사례다. 1840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격렬한 폭풍 속에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배 에서 밖으로 던져지는 비인간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또한 이 작품은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잔인성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인간 착취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회화적 증언이다. 그러나 노 예무역의 열악한 환경은 종 호 사건은 물론 노예무역을 둘러싼 복잡한 법적 문제를 발생시 켰다. 본 연구는 <노예선>이 ‘노예제 폐지’나 ‘노예무역폐지’와 같은 사안들과 결합하는 과정 에서 파생되는 메시지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는지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분석 한다. 이를 통해 노예제도에 함축된 정치경제적 맥락과 작가의 조형 의식 형성 간의 관계성 을 조명하여 터너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론적 지형도를 확장시키는데 집중한다.
중세 고딕 성당에서 시작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오늘날 중세와 비교해서 매우 다양하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테인드 글라스’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는 이유를 규명해 보는 것 이 본 연구의 목표다. 우리가 흔히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부르는 예술은 중세 이후 쇠퇴하였 다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동안 영국과 미국에서 리바이벌되었다. 필자는 주요 연구 대상인 잡지 『더 크래프츠맨』 1903년 3월호에 실린 프레더릭 S. 램(Frederick S. Lamb)의 「채색창」과 찰스 H. 캐핀(Charles H. Caffin)의 「장식창」을 고찰하여, 그들이 공통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본질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음을 밝히고, 그러한 고민의 배경에 스테인드글라스 리바이벌을 이끈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이론과 이상의 영향을 확인하였다. 램과 캐핀의 논쟁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본질과 고유한 특성을 되살리려는 노력 을 통해 창조적 예술 매체로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명맥이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술관은 일반적으로 전시, 교육, 연구 등을 포함한 활동 전반에 있어서 공적 책임이 있 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공적이라는 기준은 행정적이고 경제적인 의미에 더불어 관람자 및 관 계자를 포함한 공중의 기대와 의도를 품은 말이다. 이렇듯 여러 의미의 혼성체인 ‘공공’은 공통적으로 이상적인 무언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졌다. 본 논문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살롱전과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1980년대 무 렵에 설립된 현대미술관들의 사례를 통해 ‘공적 영역’으로서 각 미술관 모델이 대변하고자 했던 시대적 이상과 열망을 논한다. 공적 영역에 관한 이론적 논의는 공중에게 예술을 개방 하고 그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했던 조건을 분석하여 미술관의 제도적 형태, 물리적 구 성, 그리고 공중의 주체성이라는 쟁점까지 고찰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백남준의 위성아트 프로젝트 시리즈의 첫 방송인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에서 예술가, 미술관, 방송국 등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협력관계로 끌어내는 과정 에서 그의 ‘쌍방향 소통’의 개념에 대하여 실증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백남준은 ‘TV’를 예술 매체 로 활용한 시점인 1960년대부터 ‘쌍방향 소통’의 가능성을 고민해 왔고, 디렉터이자 플레이어로 서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는 퍼포먼스를 이어왔다. 이후 위성방송 시스템이 상용화로 그 개념을 실천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그는 스스로 플레이어 자리에서 내려와 1984년부터 2년을 주기로 위성아트 프로젝트 3부작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탐구와 실험들이 위성아트 프로젝트에서 다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논리적 기반이 되었음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중 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